생명운동과 협동운동의 선구자, 무위당 장일순의 첫 평전!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 1928~1994)은 시대를 내다보는 깊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민중(민족)의 앞길을 제시하고, 시대마다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찾았고, 소임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늘 소외되고 핍박받는 민초들과 함께했다.
1. 출생과 성장
장일순은 아버지 장복흥과 어머니 김복희 사이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남 철순이 열다섯 살에 사망하여 일순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장일순은 원주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할아버지의 친구이자 독립운동가인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 1874~1949) 선생에게서 글을 배웠다. 차강은 이 집안의 식객으로 한문과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장일순이 일가를 이룬 서예와 그림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940년 봄에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한 장일순은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 원동교회에서 세례명 요한으로 영세를 받고 평생 천주교 신자로 지냈다. 중학교부터는 서울로 유학하여 배재중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장일순은 할아버지가 지은 서울 명륜동에 있는 집에서 배재중고등학교에 다녔다. 1944년, 장일순은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경성공업전문학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이다. 장일순은 1945년에 미군 대령의 총장 취임을 핵심으로 하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이른바 국대안) 반대 투쟁의 주요 참여자로 지목되어 제적되었다가, 1946년에 서울대학교 미학과(1회)에 입학했다. 그러나 6·25사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돌아왔다.
2. 전쟁 경험과 교육사업
장일순은 1·4후퇴 시기에 군입대 적령기여서 군속으로 징집되었다. 영어를 잘해서 미군들이 있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배치되었다. 제대한 장일순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원주를 떠나지 않았고 ‘영원한 원주 사람’이 되었다.
1953년, 25살이던 장일순은 성육(聖育)고등공민학교 교사로 들어갔다. 월급도 받지 않는 자원봉사였다. 1년여 후 교사들은 리더십과 포용력이 뛰어난 장일순을 교장으로 추대했다.
1954년, 장일순은 도산 안창호가 평양에 설립했던 민족학교 대성학원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학교 이름을 대성학교로 고치고, 학생들의 인성교육에 특히 신경을 쓴다는 의미로 교훈을 ‘참되자’로 정했다.
3. 결혼과 정치 활동의 좌절
1957년, 장일순은 서울에 사는 이인숙(李仁淑)과 결혼했다. 이인숙은 험난한 시대에 ‘시대와 불화(不和)’하는 남편을 내조하면서 가정을 지켰다. 장일순이 일관되게 시대정신을 지키면서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인숙의 헌신적인 내조의 공이 컸다.
제4대 민의원 총선거가 1958년 5월 2일에 실시되었다. 장일순은 무소속으로 총선에 입후보했다. 그는 자금도 조직도 없는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자유당의 관권 부정선거에 맞섰다. 결과는 쓰라린 패배였다.
1960년 11월 24일 사회대중당이 창당되었다. 사회대중당은 창당을 준비하면서 그해 7월 29일 실시한 민·참의원 선거에 참여했다. 그러나 재야정당이 난립하는 바람에 참패하고 말았다. 장일순도 원주에서 입후보했다가 낙선했다.
장일순은 청년 시절 사회를 개혁하고 싶은 열망이 넘쳤다. 그래서 보수적인 민주당보다는 혁신적인 사회대중당을 택했다. 특히 이 당의 영세중립화 정책에 마음이 쏠렸다. 장일순은 선거연설을 하면서 중립화 통일론을 역설했다.
4. 8년형 선고, 3년 수감생활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쿠데타 세력은 반공을 국시로 내걸고 평화통일 또는 중립화 통일 주창자들을 용공으로 몰아 일제히 구속했다. 5월 18일, 장일순도 다른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경찰에 검거되었다. 검찰은 장일순에게 징역 8년을 구형하고, 혁명재판소 재판장 김홍규는 검찰 기소장의 복사판이나 다름없는 판결문으로 징역 8년을 선고했다. 장일순은 33살에 사상범이라는 무거운 낙인이 찍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장일순은 평생 책을 가까이 한 독서인이었다. 장일순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면서 노역이 없을 때는 열심히 책을 읽었다. 동서양의 고전을 주로 읽고, 영어로 된 진보사상 관련 원서도 읽었다. 장일순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이감되어 수감생활을 하던 춘천교도소에서 수감된지 3년만에 석방되었다.
5. 출감 이후의 활동
장일순은 몸은 풀려났으나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혐의자들에게 이른바 ‘보안관찰’의 대상으로 삼아 공직 취임은 물론 해외여행을 제한했으며, 만나는 사람까지 일일이 신고하도록 했다. 전두환이 집권한 1981년경에는 장일순의 토담집으로 향하는 골목 입구에 파출소까지 만들어 집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했다.
장일순이 가산을 쏟아 만들었던 대성학교는 그 사이 크게 쇠락해져 있었다. 장일순은 학교를 재건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교육사업뿐이라고 믿었다.
1964년 4월 2일, 원주 대성고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일어났다. 대성고 학생 300여 명은 굴욕외교반대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와 원주시청 앞까지 진출했다. 전국에서 고등학생들이 시위에 나선 것은 대성고가 처음이었다. 이 시위로 대성고 학생대표 7명이 퇴학 처분을 받았다. 장일순은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이사회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1964년부터 4년여 동안 포도 농사를 지었다.
6. 가톨릭을 기반으로 한 사회개혁운동
1965년 3월, 교황은 한국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목현장을 실천할 신부로 44살의 젊은 신부 지학순을 선택해 원주교구장으로 임명했다. 지학순 주교에게는 자신의 뜻을 함께할 동지가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만난 사람이 장일순이었다. 장일순의 나이 37살 때였다. 지학순 주교는 장일순을 원주교구 사도회장에 임명했고, 원주교구를 배경으로 사회 전반적인 운동을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1966년 11월, 원동성당 내에 원주 최초의 신협인 원주신협이 설립되었다. 이사장은 장일순이 맡았다. 그리고 1971년 8월에 장일순은 대성고등학교 제자들과 함께 원주 가톨릭센터에서 밝음신협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후 밝음신협은 발전을 거듭하면서 단순히 금융기관 차원이 아니라 신협운동에 기반한 지역개발사업을 활발히 전개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현재 원주시 인구 36만 명 중 원주시민의 44%인 15만 명이 신용협동조합원이다. 신협을 통해 현재까지 약 1조원 이상의 자산이 형성되어 지역사회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1972년 8월, 남한강 유역에 집중호우가 쏟아져 원주교구 산하 탄광 지대와 제천·단양 지역 등 남한강 유역의 13개 시·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73년 1월 22일, 지학순 주교는 재해복구사업을 집행할 집행위원장에 당시 원주교구 기획실장인 김영주를 임명하고, 원주교구 평신도회의 장일순, 장화순 형제와 함께 하도록 했다. 재해대책사업이 성과를 내면서 원주를 비롯해 강원도 내에 신용협동조합이 여러 곳에 설립되고, 농민들은 연대해 농가의 생산소득을 높일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았다.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은 남한강 수해복구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성과를 보이자 이번에는 광산촌으로 눈을 돌렸다. 광부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뽑고, 노동금고 등 폐쇄적인 조합을 신용협동조합으로 전환하려고 노력했다. 장일순은 광산촌을 찾아 광부들에게 신용협동조합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신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1977년에 협동조합운동은 3개도 13개 시·군, 90여 개 농촌 마을과 10여 개 탄광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7. 유신체제의 폭압 속에서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은 의기투합하여 가톨릭센터를 거점으로 두 사람이 평생 추구해온 교육운동과 협동조합운동, 민주화운동 등 사회개혁운동을 과감하게 펼쳐나가게 된다. 이때부터 원주 가톨릭센터는 독재정권의 탄압을 피해 원주로 피신해 오는 대학생과 민주인사들의 해방구이자 민주화운동의 거점 장소가 되었다. 더불어 원주는 ‘민주화의 성지’라고 불리며,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뜨겁고도 역사적인 도시로 떠올랐다.
1974년 4월 3일 박정희 정권은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했다. 지학순 주교는 반혁명단체인 민청학련에 시위자금을 제공했다는 어마어마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구속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계기로 1974년 9월 24일 원주 원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되고, 1차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원주에서 시위를 마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9월 26일에 서울 명동성당에서 유신헌법의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을 내세운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천주교 신부들의 거센 비판을 시발로 각계에서 들불처럼 번지는 반유신 저항운동, 여기에 국제인권단체가 한국 정부의 인권탄압을 비판하면서 박정희 정권은 구속자 일부를 석방했다. 1975년 2월, 지학순 주교도 풀려났다. 장일순은 지학순 주교를 얼싸안고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면서 새로운 결의를 다졌다.
8. 생명운동으로 동학을 부활시켜
장일순이 살아오면서 다양한 일을 했지만, 그중에서 알짬이라면 최시형의 사상을 모태로 하고 자신의 철학을 보태어 생명사상을 정립한 일이다. 즉 생명경시, 물질만능이 익숙해진 세태에 생명존중을 시대적(미래적) 가치로 제시한 일이다. 생명은 우주만물의 근원이고 중심이다. 생명이 없는 사회·지구란 상상하기 어렵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부처의 말씀도 ‘독존(獨尊)’이라는 한자식 표현에도 불구하고 근본 뜻은 생명의 존귀함을 말한다.
9. 민주화 운동가들의 정신적 구심체
장일순은 어느 면에서도 발광체(發光體)가 아니었다. 정치적인 걸물도 아니고, 언론계나 학계의 거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교계나 문화계의 지도자도 아니었다. 유별난 사건으로 유명인사가 된 것도 아니고, 특이한 작품으로 저명인사의 반열에 오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1970년대 원주 그의 집에는 당대의 올곧은 인사들과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청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나중에 권력의 곤룡포 속으로 찾아 들거나 초심을 잃고 변절한 자들도 없지 않았으나, 다수는 군사독재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이 땅의 민주화에 이바지했다. 장일순은 이런 의식 있는 인사들의 정신적 구심체 역할을 했다.
10. 저항과 예술의 변증법
긴급조치 9호 선포로 폭압의 어둠이 짙게 깔릴 때, ‘70년대 민주화의 성지’ 원주에서 봉화가 올랐다. 1976년 1월 23일, 천주교 원주교구 원동성당에서 ‘인권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신·구교의 목사, 신부,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그동안 장일순과 함께 협동조합운동에 참여한 상인, 농민, 광부 등 수백 명이 참석했다. 늘 그렇듯 장일순은 뒤에서 조용히 사람들을 모으는 등 기도회를 준비했다. 3·1 민주구국선언의 모체가 된 ‘원주선언’은 유신의 심장을 겨눈 비수였다.
유신과 5공 시대에 양심수가 늘어나면서 구속자가족협의회 등 이들을 뒷바라지하는 재야단체들이 생겨났다. 일부 종교단체와 해외 인권단체의 기부금이 들어왔으나 워낙 구속자가 많아서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생긴 것이 ‘기금모금 서화전’이었다. 장일순은 기금모금 서화전이 열린다는 연락을 받을 때마다 흔쾌히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써주었다.
장일순이 남긴 서화 중에는 난초 그림이 유난히 많았다. 조선시대 올곧은 선비들이 그랬듯이, 그도 자신과 난을 일체화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군자 중에서도 난을 많이 쳤다.
장일순의 글씨는 독특하다. 그 나름의 필체인 것이다. 우리나라 서예계에서는 오래전부터 ‘한석봉체’, ‘추사체’ 등이 정식처럼 자리잡았다. 장일순은 이같은 ‘정통서체’ 형식을 취하지 않고 자신의 스승이었던 박기정 선생의 필법에 자신의 맑은 정신을 배합하여 ‘무위당체’를 개발하였다.
11. 한살림 운동
1985년 6월 24일, 장일순은 발기인 21명이 1,000원씩 낸 출자금 10,000원으로 농산물 도농직거래 조직인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을 창립하고, 박재일을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하여 생명운동을 생활 속의 실천운동으로 전개했다. 1990년대에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은 원주한살림으로 이름을 바꾼다. 한살림이란 ‘하나, 전체·함께’라는 뜻인 ‘한’과, ‘살려낸다, 산다’라는 뜻인 ‘살림’을 합쳐 만든 뜻이다. 모든 생명을 함께 살려내고, 생명의 가치관·세계관으로 온 생명이 한집 살림을 살 듯 더불어 살자는 의미다. 현재 한살림은 전국에 130여 개 조합, 65만 조합원을 둔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장일순은 한살림운동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1988년에 ‘한살림연구회’를 만들었다. 연구회는 시대상황을 진단하고 성찰하는 한편 대안과 실천방향을 제시하는 모임이었다. 여러 차례의 학습 모임과 토론회를 거쳐 동학사상과 두레 공동체의 전통, 그리고 일본의 생협운동과 스페인 몬드라곤 공동체 등 다양한 내용과 사례 등을 검토하고, 토론의 결과를 문건으로 정리했다. 장일순도 빠지지 않고 회의에 참석했다. 1989년 10월, 한살림연구회는 ‘한살림선언: 생명의 지평을 바라보면서’라는 제목으로 선언문을 채택했다.
12. 해월 최시형 추모비를 세우다
장일순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은 해월 최시형이다. 해월 연구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사람들이 장일순을 ‘걸어다니는 동학’, ‘살아 있는 해월’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의 집 안방 아랫목에는 언제나 해월의 낡은 흑백사진이 놓여 있었다.
장일순은 오래전부터 해월을 기리는 사업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해월이 관군에게 붙잡힌 현장에 추모비라도 세우기로 했다. 천도교나 학계에서 해야 할 일을 그가 맡고 나선 것이다. 원주의 제자 그룹 중에 ‘치악고미술동우회’ 회원들이 모금을 하고 헌신하여 마침내 일이 성사되었다. 1990년 4월 12일에 추모비 제막식 행사를 가졌다.
13.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다
장일순의 일생을 두고 관통하는 습성의 하나는 겸손이다. 그는 사회적 위상과 명성이 따를수록 더욱 겸양하고 겸손했다. 겸손의 덕목에는 부드러움을 빼놓을 수 없다. 부드러움으로 강한 것을 이긴다는 노장사상의 발현이었다. 그는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부드러움의 철학을 실천하며 살았다.
장일순은 학자도 문사도 아니요, 종교지도자도 사회사업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사상가도 철학자도 아니다. 물론 정치인도 아니고 사업가는 더욱 아니다. 뚜렷하게 내세울 전공이 무엇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이렇다 할 저술을 남긴 것도 없다.
사는 것이나 먹고 입는 것도 보통사람들과 다르지 않고, 평소에 말을 하거나 연설·강연을 할 때도 대학교수나 무지랭이나 함께 들을 수 있는 내용으로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의 초라한 집에 시도 때도 없이 전국 각지에서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오염되지 않은 청아한 도덕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는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았다.
14. 운명, 그리고 삶의 궤적
장일순은 1990년부터 차츰 건강에 이상징후가 나타났다. 그러나 벌여놓은 일이 많았고, 찾는 사람도 줄지 않아서 일상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이듬해인 1991년 6월 14일에 위암 진단을 받았다. 생과 사에 크게 괘념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원주기독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강연을 하고, 업무를 보고, 사람들을 만났다. 한 해 전에 선종한 지학순주교 기념사업회 구성을 지도하는 등 열정을 다해 평생의 동지이던 지학순 주교의 추모사업을 독려했다.
1994년 5월 22일, 장일순은 부인과 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봉산동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67살이었다.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신을 쪼개어 남김없이 나누어주고, 자신을 낮추어 누군가를 떠받든 삶이었다. 한마디로 춘풍추상(春風秋霜) 같은 삶이었다.
무위당 장일순 서거 25주기(2019년)를 기념해 출간된 이 책은, 무위당이 평생 추구한 사상과 운동을 따르고 실천하는 모임 '무위당사람들'이 감수한 무위당 장일순의 첫 평전이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장일순의 사진들과 그의 대표적인 시서화 작품 50여 점도 함께 실려 있다. 이 책은 무위당의 아름다운 삶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