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도수 스님(속명: 박찬수)의 대담과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편집자
(3) 선본사 범종 이야기
당시 선본사에는 범종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산소통 중간 부분을 잘라낸 뒤 매달아 종으로 사용했다. 그 후 어찌어찌해서 작은 종을 마련하여 그나마 잔잔한 마음의 평화를 가졌는데 어느 날, 도둑이 들어 부엌에 있던 양은 그릇과 함께 종까지 몽땅 훔쳐 가버렸다. 그 뒤 와촌면 계전동溪田洞 하천 모래사장에서 누군가 종을 부수며, 선본사 주지가 종을 훔쳐 팔아먹었다고 하는 소문이 나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억울했지만, 건사하지 못한 나의 탓으로 돌리며 범종을 마련하기 위해 탁발에 나섰다.
비산동, 내당동을 거쳐 달성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수창초등학교 근처를 지나는데, 해는 중천에 떠 있고 삼복더위에 시장기까지 지친 몸을 엄습해 오고 있었다. 큰 대문 앞에 웬 여자아이가 나와 놀다가, 나를 보더니 “스님이다, 스님이다” 하며 쪼르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뒤, 할머니 한 분이 나오더니 합장하며 인사했다. 더운데 시원한 물이라도 마시고 가라는 이야기에, 못 이기는 척 마당으로 들어섰다. 정성스레 가꾸어 놓은 정원에는 꽃들이 만발하고, 컹컹거리며 짖던 개도 할머니의 손짓에 조용해졌다. 윤이 나도록 닦인 대청마루에 앉아 시원한 선풍기 바람에 온몸을 맡기며, 할머니가 내온 녹두죽 한 그릇을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내 시장함을 눈치챘는지 할머니는 녹두죽 한 대접을 더 내놓았다. 달게 점심을 먹자마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스님, 비도 피하실 겸 방에서 잠시 눈이라도 붙이시지요.”
할머니가 깔아놓은 군용 담요 위에 무거운 몸을 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스님, 저녁 드시러 나오시지요.”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사방이 어둑어둑했다. 민망함으로 몸 둘 바 모르는데, 밖으로 나와 보니 입이 쩍 벌어질 만큼 화려한 저녁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이 집 주인은 동방경유회사 박동욱 사장이었다. 보살인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더니, 박 사장은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팔공산에서 제일 먼저 들어선 절이 선본사입니다. 지금 선본사 주지로 있는데, 종을 마련하고자 이렇게 동냥에 나섰습니다.”
내 이야기를 듣더니 웃으며 동냥해서 언제 종을 마련하겠습니까 하며, 선뜻 금복주에서 발행한 78만 원짜리 수표를 꺼냈다. 그렇게 큰 액수를 처음 본 난 깜짝 놀라며, 이 큰돈을 어떻게 쓰는지도 모른다며 손을 내저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할머니가 그러지 말고 우리 집에서 하룻밤 묵고, 내일 아침 일찍 종을 사러 서문시장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며 말을 건넸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서문시장에 가서 가장 울림이 깊은 범종을 골랐다. 종에는 시주를 한 사람의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했더니, 박 사장이 한사코 자기 이름을 빼고 아이들 이름만 새기면 좋겠다고 하는 걸 기어이 허락받아, 종에 이름을 새겼다. 종을 마련했지만, 선본사까지 운반하는 일이 또 문제였다. 세 발 달린 용달차에 종을 싣고 팔공산 도학동 삼거리에 내려놓고,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선본사까지 운반하는데 장정 네 명을 동원해야 했다. 아침 8시에 출발하여 옮기기 시작한 종은 장정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지고, 저녁 9시가 되어서야 절에 도착하였다. 운반비로 사람마다 쌀 반가마니 값(1,400원)을 치렀다. 이윽고 날을 받아서 박 사장의 시주로 쌀 1가마니, 콩 1말, 팥 1말, 절에서 사용할 이불 두 채가 도착하고, 종대를 세우고 타종 불사를 하였다. 시주한 범종은 지금 선본사 극락전 안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