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① 장례 때면 인기 있던 두 사람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① 장례 때면 인기 있던 두 사람
  • 정재용 기자
  • 승인 2019.04.02 13:10
  • 댓글 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소평마을’이 있던 자리는 태풍 글래디스 후 지도에서 흔적만 남았다.
∙ 마을에 초상이 나면 황수관 박사의 아버지는 염을 하고 필자의 아버지는 붓을 잡았다.

필자가 자라난 마을은 소평(小坪)이다. 지금은 인근 '창말' 로 집단 이주한 상태지만, 태풍 '글래디스(1991년 8월 23일 마을에 큰 피해를 주었음)' 이전까지는 경주 양동마을(2010년 7월 3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에서 서쪽으로 펼쳐진 안강평야의 가운데 있었다.

형산강 유역으로 물이 풍부하여 농사짓기는 좋았으나, 한편 하류라서 여름이 되면 연중행사처럼 가옥 침수의 위험에 시달려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태풍 뉴스가 나오면 피난 보따리부터 싸 놓고 잠을 설쳤다.

마을이 평야 복판에 홀로 오도카니 엎드려 있는 모습은 양동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전체가 한 채의 초가집처럼 아담했고, 보다 높은 어래산(571.6m) 정상에 올라서보면 널따란 멍석 위에 박 바가지 하나 엎어 놓은 것 같았다.

소평 동네는 양동마을 서편의 안강들 복판에 50여호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외딴 마을이었다.
소평은 양동마을 서편의 안강들 복판에 5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외딴 마을이었다. 사진은 마을 남쪽에서 전면을 찍은 것으로 오른쪽 끝에 교회 종탑이 보인다. 뒤로 멀리 보이는 산이 어래산이다.

외딴 자연부락 소평은 5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이다 보니 서로가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았다. 모두가 어른부터 아이까지 이름을 아는 것은 물론이고 머리 좋은 사람은 생일이나 길흉사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에 길흉사가 생기면 모두가 내 일인 양 팔을 걷고 나섰다.

마을 복판에는 6.25 전쟁 직후에 생긴 예배당이 하나 있었다. 안강제일교회에 출석하던 황일룡 장로가 자기 집 사랑채를 내놓아 교회를 시작했다. 이후 그 교회에서 분립하여 '소평교회'라고 이름 짓고 초가집 한 채를 사서 예배당으로 개축했다. 뾰족 종각이 고깔모자처럼 예뻤다. 교회는 마을의 유일한 공공기관이었고 수년마다 바뀌는 목회자는 마을 전체의 뉴스거리였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교인은 물론이고 마을주민 누구나 염(殮)을 위해서는 황봉룡 씨를, 명정과 널에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필자의 아버지인 정응해 씨를 찾았다. 두 사람 모두 소평교회 집사였다.

당시, 마을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교인' 또는 '믿는 사람'이라 불렀고 아닌 사람들을 '안 믿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는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모두가 그렇게 불렀다. 믿는 사람들끼리는 자주 모이다보니 습관적으로 '우리'라는 말을 하나 더 넣어 '우리 믿는 사람'이라고들 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점쟁이를 찾아가서 물었다. 당시 마을에 연세 많은 점쟁이 한 사람이 있었는데, 연말연시가 되면 그 집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토정비결을 보려는 사람, 결혼 날짜, 집수리는 날짜 등 길일을 받으려는 사람, 태어날 아기 이름을 받으려는 사람, 굿 신청 등을 위해서였다.

초상에서 가장 급한 것은 염하기와 부고 보내기였다. 염은 모두가 꺼려하는 일이었다. 시체를 만지는 것을 즐겨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집 귀신이 자기에게 붙을까 염려됐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귀신을 겁내지 않는 '믿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맘씨 좋은 황 집사는 두말 않고 도맡아 해 주었다.

물론 널을 파는 읍내 장의사를 불러 할 수도 있지만 돈이 드니 동민들은 편하다는 핑계로 황 집사를 불렀다. 그러다보니 피차가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어떤 때는 황 집사는 논에서 일하다가 불려왔다. 소득 없는 일에 부랴부랴 달려왔음에도 “염할 시간이 지났는데 늦었다”고 상주로부터 짜증 섞인 말을 듣기도 했다.

정 집사는 작은 붓으로 부고 쓰기, 큰 붓으로 명정과 널과 만장에 글씨 쓰기, 펜으로 부조계 쓰기 차지였다. 동네에 정 집사만큼 붓글씨를 잘 쓰는 이도 드물었거니와 한문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는 부조 봉투는 반드시 한문으로 이름을 써야 예의인 줄로 알던 시대였다.

 

소평교회 처음 예배당을 배경으로 찍은 교인들 모습이다. 뒷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정응해 씨, 여섯번째 안경을 쓴 이가 황봉룡 씨다.
소평교회 처음 예배당을 배경으로 찍은 교인들 모습이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정응해 씨, 여섯 번째 안경을 쓴 이가 황봉룡 씨다.

'명정(銘旌)'은 고인의 명패다.

정 집사는 '처사000공지구(處士000公之柩)'라고 아래로 써 내려갔다. 000은 고인의 본관과 성씨다. 여기서 '처사'란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를 뜻하며, '공'은 고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예를 들어, 고인이 '봉화 정씨' 성을 가졌다면 '처사봉화정공지구'라고 썼다. 이는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 봉화 정씨의 널'이란 뜻이 된다. 어떤 때는 '처사' 대신 '학생(學生)'이라고 썼다. 뜻은 마찬가지였다.

믿는 사람일 경우에는 처사 대신 성도(聖徒)라는 글을 썼다. 고인이 집사라면 '성도000씨지구' 또는 ‘집사000씨지구’라고 썼다. 그리고 여자일 경우에는 '유인000씨지구(孺人000氏之柩)라고 썼다. 여기서 '유인'이란 '생전에 벼슬 하지 못한 사람의 아내'를 뜻하는 말이다.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초상은 소평교회 설립자인 황일룡 씨가 돌아가셨을 때다. 동네 앞을 나가는 행렬은 명정을 앞세운 깃발들이 휘날렸다. 마을사람들 모두가 나와 애도하며 상여 나가는 것을 구경했다. 필자도 긴 장대 하나를 들었다. 그 위에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한문 글귀의 만장이 걸려있었다. 상여는 능곡 묘지로 향했다.  

동네의 동편에 위치한 양동산이다. 소평 동네는 비닐 보이는 자리에 있었다. 사진에서는 바로 산 아래 동네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2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마을의 동편에 위치한 양동산이다. 소평마을은 비닐 보이는 자리에 있었다. 사진에서는 바로 산 아래 마을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2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제는 황 집사도 정 집사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두 사람 다 객지, 아들 따라 도시에 가서 살다가 본인들이 장례를 치러 준 소평 동민이 아닌, 다른 이들의 애도 속에 하늘나라로 갔다. 황 집사는 황일룡 씨의 친동생이요 황수관 박사의 아버지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