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화단에도 아파트 화단에도 살구들이 익었다. 마트나 백화점에도 살구를 파는 매장이 생겼다. 좀처럼 전통 과일을 보기 힘들었는데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노래가 생각나, 살구와 살구나무 그리고 은행나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살구나무는 중국이 고향인데,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이전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살구는 복숭아, 자두와 함께 우리 선조들이 즐겨 먹던 옛 과일이다. 서민의 생활상을 그린 옛 그림을 보면, 오막살이 윗녘에는 흔히 살구나무 한 그루가 연분홍 꽃을 매달고 있다. 매화가 양반들의 멋을 내는 귀족나무였다면, 살구나무는 질박하게 살아온 서민들과 함께한 나무였다. 살구나무는 배고픔이 한창인 초여름에 먹음직스런 열매가 잔뜩 열리는 고마운 나무이며 먹고 난 뒤 남은 씨앗은 바로 약으로 쓰였다. 행인(杏仁)이라 불리는 살구씨는 만병통치약이다. 동쪽으로 뻗은 가지에서 살구 다섯 알을 따내 씨를 발라 동쪽에서 흐르는 물을 길어 담가두었다가 이른 새벽에 이를 잘 씹어 먹으면 오장의 잡물을 씻어내고, 육부의 풍을 몰아내며, 눈을 밝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살구나무가 많은 마을에는 염병이 못 들어온다는 이야기까지 있는가 하면, 열매가 많이 달리는 해에는 병충해가 없어 풍년이 든다고도 한다.
최근 살구 열매의 육질을 분석한 결과 비타민 A가 풍부하고, 신진대사를 도와주는 구연산과 사과산이 2~3퍼센트쯤 들어 있다고 한다. 이런 성분들은 특히 여름철 체력이 떨어질 때 크게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으며 제철 과일인 살구도 많이 먹으면 좋다.
살구나무는 꽃과 과일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무의 쓰임도 요긴하다. 산사에서 스님이 두들기는 목탁의 맑고 은은한 소리는 찌든 세상의 번뇌를 모두 잊게 한다하는데, 바로 살구나무 목탁에서 얻어지는 소리다. 목탁은 역시 살구나무 고목이라야 제대로 된 소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맑고 매끄러운 흰 속살에 너무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은 재질을 가진 탓이다.
한자 이름인 행(杏)은 원래 살구를 뜻하나 은행도 같은 자를 써서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하는데, 그가 죽고 난 후 한참 뒤에 이곳을 세우면서 주위에 ‘행’을 많이 심어 행단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행단의 나무가 살구나무인지 은행나무인지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우리 땅에도 살구나무와 아주 닮은 나무가 있다. 중부 이북에서 주로 자라며, 줄기에 두꺼운 코르크가 발달한 개살구나무다. 열매는 살구보다 좀 작고 떫은맛이 강하여 먹기가 거북살스런 탓에 들여온 살구나무가 주인이 되고 우리 살구나무는 앞에 ‘개’가 붙어 버렸다. 맛 좋고 굵기도 더 굵은 수입 살구에 밀린 셈이다. 결국 우리의 개살구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속담처럼 볼품 없고 실속이 없을 때 쓰이는 말이 되어 버렸다. 깊은 산에서나 만날 수 있는 토종 개살구에게 작은 관심이라도 가져주면 좋겠다.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곳 행단에 대하여, 이수광과 정약용은 행단의 나무는 살구나무라 하고, 이규경과 허목은 은행나무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 중국 칭화대학의 팽림(彭林) 교수는 공자의 행단에 심긴 나무가 살구나무였음을 몇가지 근거를 들어 입증 했는데, 북송시대 이전의 문헌에는 은행나무라는 이름 자체가 사용되지 않았고 또 은행나무는 남방지역에서만 자랐다고 했으며, 진나라 때는 은행을 평중, 송나라 때는 압각수라고 불렀고,은행이라는 명칭은 1054년 구양수의 시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봐 설들력이 있다. 또 팽림 교수는 은행나무가 한국과 일본에 전해진 것은 당나라 때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서원과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는 것은 은행나무가 장수하고 벌레도 없고 중국에서 왔으니 행단을 은행나무로 짐작한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또 공자와 관련된 나무는 은행나무로 각인 된것은 살구나무의 잘못이 아닌가 생각한다.
산둥성 취추현, 공자를 모신 공부(孔府)의 행단(杏壇)이라고 하는 곳에는 살구꽃의 명소인 행원(杏園, 살구나무행, 동산원)이 펼쳐져 은행나무가 아닌 살구나무가 자라고 있다.
시골 마을에는 큰 살구 나무가 많았다. 기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주전부리거리가 없어 익지도 않은 살구나무에 돌을 던져 따먹었는데 어른들이 다 익으면 어린이가 있는 집에는 골고루 나눠 주기도 했다. 고향에 가 보니 살구나무는 아직도 작은 열매를 조롱조롱 달고 있었는데 주워 가는 사람도 없고 주워 먹을 아이도 없어 누구라도 가져 가라고 모아 뒀다 이것이 시골 인심이구나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