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과 창경원 이전
1971년 8월경 서울 연세대 앞 신촌시장 뒤 창천동으로 이사 온 박재희 여사 집에서 장영봉씨 부인 황경순 여사와 태완선(1915~1988) 총재(뒤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역임)의 부인 김길순 여사와 스님 4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박 여사는 모처럼 서울에 올라온 나를 위해 창경원 구경을 제안했다. 동·식물원을 구경하고 돌아와서 늦은 점심 후, 박 여사는 “내가 죽을 날이 다가옵니다. 대통령의 누님으로서 제가 나라를 위해 할 일이 없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오늘 오전 창경원을 다녀왔으니 말씀드립니다. 원래는 창경궁입니다. 일본이 궁을 격하시켜 민족의 얼을 짓밟으려고 획책하여, 창경원으로 고쳐 식물원과 동물사를 지었습니다. 이참에 우리의 얼이 담긴 창경궁을 되찾자는 의미로, 각하께 동물원을 옮기도록 건의하면 좋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박 여사는 잊어버리기 전에 가야겠다며, 옷매무새를 다듬고 그 길로 청와대를 찾았다.
그 후에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청와대를 방문하였다. 엄격한 절차를 걸쳐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서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이런 좋은 의견을 전해줘 고맙다며, 박 대통령이 직접 5,000원권 빳빳한 신화(1971년 7월 1일 처음 발행) 200장 일금 100만 원을 나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감격스러웠다. 보잘것없는 시골 사는 승려에 불과한 나의 이야기를 거두어주고 격려해 준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돌아와서 박 대통령을 위하여 천일기도를 드렸다.
그 하사금을 가지고 윤달금 보살을 찾았다. 그동안 흔쾌히 변호사 비용을 부담한 윤 보살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마지막 남은 빚을 청산했다. 마음의 빚을 털어내는 기분이라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선본사로 돌아왔다.
◆ 끄트머리
1970년 9월 22일, 대법원에서 갓바위 불상은 선본사 소유라는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마지막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 그때까지 도움을 준 많은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분 한 분 되짚어가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 또한 부처님의 섭리임을 느끼며 돌아온 선본사.
나를 기다리는 것은 선본사를 떠나라는 통지였다. 어차피 세상사 모든 일이 그런 게 아니겠는가. 오히려 내게 주어진 시간을 유연자적(속세를 떠나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며 편안하게 살다)하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니 편안해졌다. 여벌 옷과 불경 몇 권을 바랑에 담았다.
선학알루미늄 장영봉 사장의 시주로 선본사에 처음 전기와 전화가 들어온 날. 두메산골 절에 전깃불이 켜지던 때, 그 새로운 세상에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하던 사람들의 모습. 전화기를 들고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으며 현대 문물의 이로움에 즐거워했다. 선본사 신도회장인 김원달 보살과 그의 남편으로 처음으로 국산 담배 필터를 생산한 공화공업 사장 강성덕 씨. 그 두 사람의 도움도 잊을 수 없다. 두 분의 시주로 대웅전 앞뒤로 석축을 신축하고, 기와도 교체할 수 있었다. 기와 6톤을 실은 덤프트럭이 6대, 인근 4개 마을에서 청년 40명을 동원하여 지게로 하루 두 차례씩, 기왓장을 1개월간 선본사까지 운반하였다. 하루 노임이 1,600원으로 당시 쌀 반 가마니보다 비쌌다.
이러저러한 인연을 부처님 앞에 내려놓으며 길을 나섰다. 영천군 대창면 용호동 오지산에 있는 영지사로 가든지, 아니면 경산군 자인면 북사동 도천산에 있는 제석사로 가라는 동화사 주지 의현 스님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선본사를 떠났다. 처음 출가한 가야산 해인사 관음암으로 향했다. 나를 처음 불렀던 부처님의 그 마음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갓바위 부처님은 변함없이 인자한 미소로 나를 내려다본다.
‘가거라, 가거라. 다 떨치고 가거라.’
부처님 가르침대로 오늘도 길 위에서 만나는 소중한 인연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모두 부처님이거늘. 길 위에서 부처님을 향해 합장한다. 피안으로 가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