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김치를 찾고, 가슴을 답답해 하고, 생목이 괴는 것으로 봐서 애가서는 모양이던데!
도원결의처럼 정식으로 사돈지간을 맺은 적도 없건만 별스럽기도 하네!
할머니는 그때 까닭 없는 바람이 불어 든다 생각했다. 바람이 스친 눈꺼풀 위로 쓰잘데기(‘쓰잘머리’의 방언)없는 눈물이 솟는다는 느낌이다. 눈에 티가 들어가지 않음에도 절로 눈물이 솟는 것만 같다. 눈물 사이로 어느 해 정월 대보름을 넘겨 돌덩이같이 굳었던 음식을 이빨로 녹이던 때가 아련하게 보인다. 오늘도 그날만 같아 촉촉하게 이슬이 눈가로 맺힌다. 암울했던 기억을 더듬는데 또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든다는 느낌이다. 비를 품은 무거운 바람, 새털처럼 가벼운 바람, 훈기를 품은 봄날의 따스한 바람, 살을 에는 초겨울의 차가운 바람, 폭풍우를 동반한 세찬 바람, 수면을 스치듯 지나가는 부드러운 바람이 한정 없이 불어온다는 느낌이다.
어디에서 왔는지도, 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바람이 연신 분다는 느낌이다. 바람이 불어가는 길이 어디 물길처럼 뚜렷하게 정해졌다던가? 동구 밖으로 구불구불 휘어지는 신작로처럼 끝이 있고 목적지가 있다던가? 불고 싶을 때 불고, 가고 싶은 곳으로 불어가는 것이 바람이 아니든가? 그 바람에 휩쓸려 바람처럼 사는 생에 후회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아둔하여 지혜롭게 살지 못했던 지난날이 가슴속에서 회한으로 응어리진다.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지만 사람답게 산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눈가로 맺힌 눈물이 태양 빛에 윤슬로 영글어진다.
두 노인네가 시간을 잊어 또 얼마나 망부석이 되었던가? 문득 날이 저무는지 산영(山影)이 엉금엉금 기어와 마을을 야금야금 삼켜온다. 시간을 짐작한 할머니가 저녁밥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일어선다. 불협화음으로 뿌드득거려 노래를 부르는 무릎을 주먹으로 두들겨 몸을 일으키자 청솔댁이
“아~ 이 사람아 아직은 일찍 구만! 아직은 남은 해가 한 발이구먼, 좀 더 앉았다가!”하면서 손을 잡아 주저앉힌다. 할머니가 마지못해 앉으면서도 별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데 여전히 찬거리가 걱정이다. 문득 어느 생각에 머물었는지 할머니가
“근데 그 애의 의견이나 이야기는 들어보고 이러기는 게요?”
“우리 며느리 말인가? 그 애라면 걱정을 말게! 이 시에미 말이라면 죽는시늉도 마다하지 않은 애니께! 그렇다고 그 애 입장에서는 양어머니를 모시는 일인데 영 물어보지 않은 것도 아니라네! 말을 꺼내자마자 흔쾌히 좋다고 하드만!”
“어째 그랬을까? 참말 별일이네!”
“자네가 모르는, 우리 그 애에게서 동상에 대한 남모르는 살뜰한 정이 있어서 그렇겠지! 우리 아들도 마찬가지고! 한데 한가지 걱정은 시집올 때만 해도 다소곳하여 얌전했는데! 내가 너무 손자 타령에 핏줄만 찾다 보니 하늘이 노했나 보네! 그 덕인지 어쩐지는 모르게 향화(香火)는 겨우겨우 이었네 만은 이리 변할 줄 내 어찌 알았겠나! 사람은 사주팔자대로 순리대로 살아야 하건만 내 유별난 극성이 재앙을 불렀나 보네! 하늘이 벌을 내리나 보네! 안 그러면 어째 그 애가 저리도 모질고도 사납게 변할 수 있단 말인가? 지 시에미를 빼다 박은 듯 성질머리를 버릴 수가 있냐는 말인가? 내 사후 자네가 액막이로 나서고 이끌어서 저 못난, 왈가닥하는 품성만 못난 돌이 정을 맞듯 맞아 두루뭉술하게, 둥글둥글하게 변한다면 오죽이나 좋으련만!”하더니 허공을 쳐다보며 길게 한숨짓더니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운명을 점쳐 알까? 더군다나 나 같은 무지렁이가 어떻게 알까? 광해 때 점치기로 유명한 남곡 '김치'조차도 몰랐다는데! 그조차도 죽을 운명을 궁금해하던 차 중국 땅에 이르러 유명한 점술가로부터 ‘화산기우객(華山騎牛客) 두재일지화(頭載一枝花)’란 글귀를 받고도 풀지 못해 역시 알지 못했다지! 그러던 모년 모월 모일 화산 땅에 이르러 우연히 두통을 얻으니 비방으로 소를 거꾸로 타란다. 비방에 따라 소를 거꾸로 타고는 자리에 누우니 어떤 여인이 머리맡에 앉아 병시중을 들더란다. 기특하고 고마워 이름을 물으니 ‘일지화’란다. 그제야 자신이 받은 시제를 떠올려 의관을 정제, 죽을 준비를 하더니 과연 수일 안에 죽었다고 하잖는가? 근데 나도 이제 상늙은이로 눈앞으로 저승사자가 오락가락하다 보니 지난 과거가 때때로 회광반조로 희미하게 보이는 듯도 하네! 그중 가장 후회되는 점은 안달복달로 며느리를 들볶은 일이라네! 요 며칠 동안 그 애를 지켜보는데 쉰 김치를 찾고, 가슴을 답답해 하고, 생목이 괴는 것으로 봐서 애가서는 모양이던데! 그렇게 들쌀(‘등살’의 방언)를 안 해도 순리대로 되는 것을! 참지 못하고 기다려주지 못하고 그 난리법석을 떨었는지 후회스럽다네! 그건 그렇고 동생은 혹 지난날의 따돌림을 두고 복수심에 불타 억하심정으로 내게 이러는 겐가? 그때 그날들이 악으로 쌓이고 앙금으로 남아 내게 어깃장으로 버티어 이런다면 정말 미안하네! 입이 열 개, 아니 스무 개라도 유구무언으로 할 말이 없네! 동생이 사죄를 원한다면 내 이 자리에서 당장 사죄를 하겠네! 머리를 땅에 처박으라면 박아서라도 사죄하겠네! 아니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다네! 그렇게라도 해서 가슴에 한으로 남은 동상의 원이 풀린다면 뭐든 원하게! 내 시키는 대로 다 하겠네! 하니 그 아이만은 나와는 별개로 내치지 말고 딸로 삼아주게! 내 이렇게 비네!”하더니 할머니의 양손을 덥석 맞잡는다. 청솔댁의 돌발에 기겁한 할머니가
“~서 서~ 성~님! 어째서 이러신다요? 그리고 내가 언제 형님께 머리를 처박으라고 했나요? 복수한다고 했어요! 죽으라고 했나요? 다 지나간 일인데요! 그리고 시방에 형님이 없으면 나는 누구랑 말동무하고, 눈만 뜨면 찾아서 하소연에 미주알고주알 입 다심으로 살아요!”
“그럼 왜 그러는가? 왜?”
“...”
“어서 승낙한다고 말하게! 속 시원하게 말해주게! 늙은이 애간장 그만 녹이고!”하는 청솔댁을 보며 마지못해
“그 애가 내 딸! 그 애가 내 딸이라!”하고 혼잣말로 읊조리는 할머니는 체념한 듯 머리가 시계-불알 모양으로 앞뒤로 연신 주억거린다. 찰나를 놓칠세라
“그~래! 그래 동상! 그래 마음먹어 줘서 고맙네! 고마워! 내 딸 아니지! 그래 오늘 이 시간부터는 자네 딸이지! 이제부터는 그 입으로 두 말, 세 말 말게나!”하더니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순사가 내민 수갑을 차듯 할머니는 청솔댁의 손길 아래 포로 아닌 포로가 된다.
수갑이 채워진 듯 잡힌 두 손으로 인해 저녁을 걱정하는 할머니는 번번이 주저앉는다. 이러다가 정말 늦겠다는 생각에 청솔댁의 손을 떨쳐 부스스 일어서려는 할머니의 눈에 영천댁이 고개는 다소곳하게 숙이고는 손을 앞으로 맞잡아 삽짝을 들어선다. 무얼 장만하는지 오후 내내 굴뚝에서 연기가 솟는 것으로 보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으로 여긴 할머니가 속으로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인가? 싶은데 지싯지싯 삽짝을 들어선 영천댁이 곧장 청솔댁 앞으로 다가가
“어머님 얼추 준비가 끝나가는데요!”
“오냐 가살스럽고 괴팍스러운 이 시에미 땜에 네가 고상스럽제? 오늘 이후 네 양어머니 될 분이시다. 앞으로 친정어머니 이상으로 여겨 정성을 다해 깍듯이 모시거라!”할 때 고개를 숙여 무안스럽다는 듯 할머니께로 슬며시 다가든 영천댁이 그간의 호칭으로 ‘아주머니, 형님’이란 단어를 잊어
“어머님 어서 가세요!”하며 전날 감골댁이 할머니를 잡아끌 듯 팔짱을 껴서는 끌어당긴다. 당황한 할머니가
“야가 어째 제 시어미를 닮아 막무가내 이런다냐! 어째 멀쩡하게 살아 있는 시어미를 옆에다 버젓이 두고는 생뚱맞게 내게 어머니라고 그런다냐? 도원결의처럼 정식으로 사돈지간을 맺은 적도 없건만 별스럽기도 하네!”하며 영천댁을 쳐다보다간 문득 생각이 난 듯
“나도 늦었지만 인자부터 바쁘게 저녁도 지어야 하고...!”하고 말을 더듬는데 영천댁이 얼굴을 붉혀 방그레 웃으며
“어머님! 오늘 저녁일랑, 내일 아침은 걱정은 마세요! 오늘 저녁과 낼 아침은 우리 집, 아니지 차린 것 없지만, 손맛이 할 수 없어 간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좌우간 딸네 집에서 드시이소! 철수엄마, 아니지 올케언니에게도 벌써 기별했어요!”하는데 할머니의 입가로는 그저 헛웃음만 감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