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지즘(ageism)은 늙은 사람을 더럽고 둔하고 어리석게 느껴 혐오하는 연령차별 현상으로 노인은 무식하고, 고지식하고, 불친절하고, 이기적이고, 비생산적이고, 의존적이고, 보수적이라는 젊은 층들의 노인에 대한 선입관을 말한다. 어원은 미국의 전문의 로버트 버틀러박사가 1969년에 제시한 용어로 나이에 따른 고정관념을 빗대어 표현한 말에서 비롯되었으며 이와 같이 노화는 혐오와 부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늙으면 사고가 폐쇄적으로 바뀌고 생산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이 일반적 관념이다. 생물학적으로 진행되는 신체 노화는 점차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면서 도움(부양)이 필요하게 된다. 대체로 15세에서 65세까지를 생산인구로 65세 이상은 사회가 부양해야할 노령인구로 구분하지만 사회가 고령화 될수록 부양 부담이 커지고 이로 인해 사회의 성장세가 둔화되니까 자연 노인에 대한 혐오의 시선은 어쩔 수없는 현실이다.
최근 일본에서 ‘플렌(plan)75’라는 충격적 영화가 등장한다. 75세가 되면 건강한 사람도 죽음을 택할 자유를 주고 정부가 그 비용을 지원해서 일본의 미래를 위해 노인들은 사라져야한다는 내용이다. 말이 자유지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정부가 건강 및 복지혜택을 중지한다. 비록 영화이긴 하지만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65세 이상이 30%를 넘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초 고령사회가 된 일본이라 생산세대가 최소한 수입의 30%를 보험료로 떼어 주어야 할 형편이라니 이해가 된다.
우리도 지난해 12월말 통계청 집계로 65세 이상 17%, 2025년 20.6%의 초 고령사회가 된다니 이제 인구의 1/5이 노인이다. 그런데 고령화 진행속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나이 듦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시각이다. 힘겹게 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보며 노인네가 집에나 있지 뭐하려 쏘다니느냐고 못 마땅해 하는 주변의 시선이며, 택시를 잡으려고 더듬거리는 노인을 보고도 못 본 척 지나쳐 버리는 택시 기사도 있다. 젊은이들은 커피숍에서 노트북 들고 작업해도 괜찮고, 노인이 커피 한잔 하면서 독서하는 건 안 된다. 취업광고를 보고 찾아간 어르신에게 너무 늙어서 안 된다는 말이 취업을 못하는 것보다 마음을 더 쓰리게 한다. 그저 쓰레기장을 돌면서 빈 박스나 모으는 게 어르신들의 취업일 수밖에 없는 걸까? 세상에서 늙은이 편은 생각보다 적다.
느리고, 추해진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자. 노인을 혐오하는 젊은이들은 그들의 젊음이 영원할 것이라 착각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늙어간다. 우리는 이 순간에도 조금씩 늙어가고 있다. 힘이 떨어지고 면역 체계가 약해지고 모든 장기의 기능이 떨어진다. 그러나 개인마다 늙어가는 정도는 다르다. 신체연령, 정신연령, 사회 연령, 기능연령 등이 각기 다른데 같은 노인으로 단정 짓는 것은 잘못이다. 나이 들수록 자기 관리에 신경 쓰자.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일이 있으면 삶의 질은 달라진다. 늙어갈수록 입은 닫고 귀는 열 것이며 잘난 체 하지 말자. 나누고 베풀며 친절과 배려, 그리고 건강하고 깔끔한 노인이 되도록 스스로 노력하자. 그리고 부지런히 움직이며 언행을 무겁게 하는 자기관리가 먼저다. 젊은 사람이 불손하다고 화를 내거나 항의하지 말자. 항의 자체가 자신의 모자람을 드러내는 것이다. 경로효친, 장유유서를 바라지는 않아도 그들도 곧 늙을 텐데 에이지즘까지는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