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은 소리글이지만 뜻이 들어있는 말이 있다. 숫자를 셀 때, 손바닥을 펴고 하나, 둘, 셋, 넷, 다섯(닫어)에 닫았다가,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열다)에 다시 연다. 아주 옛날에는 ‘다섯’을 ‘닫어’라고 발음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 선조들은 다섯 손가락으로 동-서-남-북-중앙 5방위와 청-적-백-흑-황 5방색을 열고 닫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요서(遼西)지역에서 홍산문화를 일으킨 동이족, 우리 선조의 일부가 산동 반도로 남하하여 갑골문자를 만들며 주역(周易)을 발전시켰다는 사실과 오행의 이치로 한글이 창제된 점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자녀들에게 다섯 손가락으로 수를 세면서 세상의 운행하는 이치를 가르쳤던 고대인들의 지혜가 이렇게 우리말에 남아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집에서 방에 ‘들어간다’ ‘나온다’ 라고 말하는 경우, 그것은 들어가고 나오는 단순한 위치 변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미국에 살고 있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아들이 한국 나온다.” 또는 “곧 미국 들어간다” 라고 할 때 이 두 말의 의미는 전자와 다르다. 미국과 한국이라는 배경(context)이 설정되면, ‘나오다’는 삶의 중심(안,本鄕) 미국에서 그 변방(밖, 外地)인 한국으로 이동함을 의미하고, ‘들어간다’는 그 반대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이 어법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한국인의 본향이 ‘삼천리 반도’이므로, 어떤 이가 ‘한국 나온다’ 라고 하면, 본말이 전도된 꼴에 심기가 편치 못 했었다. 본말을 바로 잡아서 ‘한국 들어온다’ 라고 마음 속으로 수정하곤 했다. 우리 한국인의 본질을 상실한 것 같아서 그러했다. 그러면서 왜 이런 언어현상이 일어나는지 그 까닭을 생각해 보았다.
여기에 해답을 준 것은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라는 견해였다. 언어학적 지식도 실존철학적인 이해도 없는 평범한 한국의 아버지가 ‘아들이 한국 나온다’ 라고 말하는 배경은 단순하다. 아버지는 아들이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고 대견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냥 ‘온다’ 라고 하는 것보다 ‘나온다’라고 해야 더 멋지고 근사한 느낌이 들게 된다. ‘나온다’고 하면 자랑스러운 아들이 미국에 살고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자랑하는 연상의미가 형성된다. 이 말의 심층구조에는 아들의 실존(미국 생활)이 본질(떠나온 한국)을 앞선다는 철학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무심코 사용하는 동사와 그 문맥에 이런 실존철학적 의미가 있다. 우리말의 묘미 중의 하나이다.
사물은 만들어질 때 고유한 목적, 즉 ‘본질’이 결정되지만, 사람은 태어나면서 의자, 책상, 연필처럼 특정한 용도가 부여되지 않는다. 사람은 그냥 ‘던져지는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던져진 존재인 인간은 여러 가지 사회문화적인 영향을 받으며 자라지만, 스스로 무엇이 되기 위해서 꾸준하게 노력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사람은 늘 새로운 선택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즉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거듭되는 선택에 책임이 따르지만, 그 책임은 사람다운 자유를 얻는 대가이다.
사르트르가 노벨 문학상에 선정되자 수상을 거부했다. 실존이 본질을 앞서기 때문에, 남들이 정해놓은 수상 기준에 따르지 않겠다는, 자신의 실존이 침해당하지 않겠다는 용단이었다. 그 결과 자신의 실존적 선택에 책임을 지면서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자유로운 사람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므로, 고민과 불안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선택과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타자가 만든 굴레 속에 수동적으로 살아간다. 군인, 공무원, 정치가 등이 이미 정해 놓은 규정에 안주하며 실존적 선택이 주는 무한한 자유를 기피한다. 또는 종교적인 삶에 의탁하면서 선택적 결단에서 오는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것을 사르트르는 ‘자기기만’이라 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격렬한 이념 충돌 상황에 놓여있다. 이념, 본질이 실존을 앞서는 현상이다. 고착된 이념을 추종하는 삶은 개인의 생애도 국가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념이 실존을 앞서면 이념의 노예가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