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스턴 미술관] 시선을 사로잡은 베스트 10 명화 산책-후편
[휴스턴 미술관] 시선을 사로잡은 베스트 10 명화 산책-후편
  • 전용희 기자
  • 승인 2024.06.1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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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 미술관 소장품 중에서
- 시선을 사로잡은 작품 10선을 골라서 나머지 5편을 소개한다
- 에필로그

지난 3일 포토뉴스 '[미국 도시 르포] 휴스턴 6-휴스턴 미술 박물관' 제하의 기사에서 124년 역사를 지닌 휴스턴 미술 박물관 (이하 휴스턴 미술관이라 한다)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그 기사에서 지면 관계상 인상파 화가인 르누아르, 세잔의 그림과 로댕의 조각품 한 점 정도만 소개했다. 

이 기사에서는 휴스턴 미술관 소장품 중에서 기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작품 '베스트 10 그림' 중에서 나머지 5편을 소개한다. 전편과 같이 오래된 작품 순이다. 

전편에서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에서 주로 활동했던, 렘브란트 반 레인, 얀 반 후이숨, 프란츠 크사버 빈터할터, 폴 고갱과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소개했다. 후편에서는 20세기 초반에 발표한 작품들을 소개한다. 

1.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러시아 모스코바 출생으로 화가이자 예술이론가이다. 독일, 러시아를 오가며 예술활동을 했고 느지막이 프랑스로 옮겨 여생을 보내고 그곳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아래 작품은 1920년에 그린 캔버스 유화로 작품명은 '스케치 160A'이다. 

칸딘스키
바실리 칸딘스키의 '스케치 160A', 1920년 작

이 그림을 보고 처음에는 누구의 작품인지 잘 몰랐다. 사실 휴스턴 미술관을 가기 전에는 칸딘스키란 이름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기자와 함께 동행한 아내가 미술에 대한 조예가 조금 있는 듯, 칸딘스키에 대하여 알려주어 보다 자세히 작품을 보게됐다. 

칸딘스키는 20세기 주요 예술가의 한 명으로 평가되며 초기 추상미술의 주요 인물이다. 피카소와 마티스와도 비교되기도 한다. 추상화 예술의 선구자 혹은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를 화가로 만든 운명적 그림이 있다. 1895년 그의 나이 29세. 다름아닌 클로드 모네의 건초더미 그림들이다. 그 그림을 볼 때는 건초더미인 줄도 몰랐다. 제목을 보고 알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느꼈다고 한다. 추상 미술의 싹을 틔운 계기가 됐다. 사실 화가가 되기 전 칸딘스키는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한 교수였다. 교수직을 버리고 화가의 길로 가게 만든 그림이 됐다. 

44세 때인 1910년 추상 미술을 발견하는 결정적 순간을 맞이한다. 거꾸로 세워진 본인의 그림으로 화실에 들어온 빛과 함께 오묘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닌 감정을 전달하고자하는 추상 미술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이 처럼 추상미술(Abstract art)은 대상의 구체적 형상이 아니라 점, 선, 면, 색과 같은 순수한 조형 요소로 표현한 미술 흐름이다. 칸딘스키는  이런 요소들을 배합하여 그의 작품을 그렸다. 그리하여 뚜렷한 사물이나 대상을 알아보기 어려워 그의 그림은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졌다.

예술가의 시선, 철학, 감정 등 내적인 요소가 작품을 표현하는 형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음악을 그림으로 바꿔 캔버스에 담기도 했다. 지면 관계상 그에 대한 많은 내용을 쓸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그는 천재 화가 임에 틀림없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칸딘스키 상설 전시관이 있는 것만 봐도 인정되는 사실이 아닐까. 

 

2.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활동하고 그곳에서 36세에 요절한 화가이다. 어린 시절부터 병치레를 많이 하고, 평생을 병약한 상태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그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 에우제니아는 그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22세때 파리로 이주해 정착했다. 세잔의 전시회를 보고 감명을 받아 그의  초기 작품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 

모딜리아니에 대한 소문은 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린 것들을 포함하여 다양하다. 그 중에서 마지막 여인이었던 잔느 에뷔테른에 대한 얘기는 가슴을 아프게 한다. 간단히 그들의 얘기속으로 들어가 본다.

두 사람은 파리 몽파르나스에서 처음으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에서 피카소와도 친교를 맺는다) 잔느의 모습에 반한 모딜리아니가 먼저 사랑을 고백하고 잔느도 강렬한 인상을 가진 미남형의 모딜리아니에게 요즘 흔히 말하는 '심쿵'했나 보다. 모딜리아니가 33세 때인 1917년 지중해 연안의 도시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해 11월 첫딸을 낳는다. 결혼식은 동거 2년 후인 1919년 7월에 간략하게 했다. 겨울이 되어도 난로도 피울 수 없을 만큼 가난하였다고 한다. 잔느는 결국에는 친정으로 돌아가고, 모딜리아니는 파리의 어느 자선병원에 입원한 이틀 후 쓸쓸하게 혼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이 잔느에게도 전해지고, 모딜리아니가 죽은 다음날 잔느도 자신의 집 6층에서 뛰어 내려 그를 따라 저세상으로 갔다. 모딜리아니의 장례 3년 후, 그 둘은 합장되어 영원한 하나가 됐다. 

모딜리아니의 묘비와 그 밑에 있는 잔느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앞 부분 생략) 이제 바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잔느 에뷔테른. 1898년 4월 6일생. 1920년 1월 25일 파리에서 죽다. 모든 것을 모딜리아니에게 바친 헌신적인 반려

잔느의 나이가 22살이 채 되기도 전, 그들의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이 났다. 이런 비극적 사랑이 오히려 모딜리아니의 삶을 신화처럼 만들지 않았을까. 모딜리아니의 묘비에 쓰인 글처럼 평생 화가로서 성공의 결실을 자신은 보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다음 그림의 작품명은  '레오폴드 즈보로스키(Reopold Zborowski)'로 1916년 작이다. 모딜리아니가 몽파르나스에 있을 때 만났던 폴란드 시인이다. 그의 초상화를 여럿 그렸다. 자신도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딜리아니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즈보로스키가 사망했을때 빚에 쪼달려, 미망인이 된 부인이 소장하고 있던 이 그림을 포함한 모딜리아니의 수집품들을 모두 팔아야 했다.

모딜리아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레오폴드 즈브로스키', 1916년 작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주로 초상화에 집중되어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큰 모자를 쓴 잔느 에뷔테른', '파란 눈의 여인', '귀걸이를 한 여인', '마담 소바쥬의 초상', '아름다운 가게 점원' 등 초상화이다. 모딜리아니는 죽기 전 3년에 걸쳐 잔느 에뷔테른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10여 점이 전해진다. 

 

3. 키스 반 동겐(Kees van Dongen, 1877-1968)

네델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난 화가로서, 20세에 파리로 나왔다. 초기에는 인상파풍의 그림을 배웠으나, 나중에  야수파 앙리 마티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야수파 또는 포비즘(Fauvism)은 20세기 초 모더니즘 예술에서 잠시 나타났던 미술사조로, 강렬한 표현과 색을 선호하는 특징이 있다. 현실을 거부하는 색상, 통제되지 않은 비자연적 색상으로 거침없이 표현했다. 동겐의 그림도 강렬한 색채가 특징으로 주로 여자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아래 그림은 1919년 작으로, 작품의 이름은 '양귀비(The Corn Poppy)'로 캔버스 유화이다. 화려한 빨간 모자에 빨간 입술 그리고 커다란 눈이 강렬하다. 상류층의 고귀한 자태는 아닌 것으로 보여, 이 모델의 직업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여자의 초상화는 강한 관능미와 퇴폐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제목이 왜 양귀비인가. 양귀비꽃을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라 한다. 동겐이 초상화로 많이 그렸던 주 대상들은 거리의 여인, 무희 등이었다. 세련된 초상화의 솜씨에 상류사회 여인들도 그에게 초상화를 많이 의뢰했다고 한다. 양귀비 처럼 마약 성분을 가지고 있는 중독성이 이 그림에서도 느껴진다.

Dongen
 키스 반 동겐의 '양귀비(The Corn Poppy)', 1919년 작

다른 작품들로는 '몽마르트의 파리지엔느'(1903년 작), '큰 모자를 쓴 여인'(1906년 작), '검은 모자를 쓴 누드'(1906년 작), '고양이와 여인'(1908년 작), '소프라노 가수 모제스코'(1908년 작), '하얀색 술장식'(1911년 작), 그리고 '화가의 뮤즈, 타마라'(1913년 작) 등이 있다. 

 

4. 마르크 샤갈(Marc Chagal, 1887-1985)

러시아 태생의 초현실주의 프랑스 화가로 모든 색 중에서 푸른색을 잘 표현한 색채의 마술사로 알려져 있다. 19세 때 당시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가서 그곳 예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를 했다. 그 당시 자연주의적 초상화와 풍경화를 그렸다. 4년 후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에 그가 도착했을때 입체파(Cubism)가 지배적 예술형태 였다. 따라서 그곳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며 입체파와 피카소의 영향을 받게된다. 샤갈은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러시아, 미국과 이태리를 옮겨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회화와 조각, 드로잉, 판화, 무대 디자인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종합예술가로 활약했다.

98세의 나이로 프랑스에서 사망할 때까지 가장 오랜 시간 머무른 곳도 역시 프랑스였다. 그래서 프랑스 화가로 보통 인정한다. 샤갈의 생애에 3명의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이 여인들은 모두 샤갈의 작품에 등장한다. 아래 그림에서도 여인이 등장한다. 그의 첫번째 아내이자 가장 많이 알려진 여인 '벨라'이다. 작품의 이름은  '여인과 장미(The Woman and the Roses)'로 1929년 작품이다. 

샤갈
마르크 샤갈의 '여인과 장미', 1929년 작

샤갈이 프랑스로 갔을 때 큐비즘의 피카소와 야수파의 마티스 두 거장이 버티고 있었다. 샤갈은 이들의 특징들을 모두 담아내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었다.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샤갈은 그곳에서도 특유의 화풍으로 명성을 이어갔다. 60대 초반에 프랑스로 다시 돌아온 샤갈은 프로방스 지역에서 피카소와 교류하며 서로 영감을 주고 받았다. 

 

5.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앙리 마티스는 프랑스 화가로, 야수파의 창시자이며 색채의 마술사로 불린다.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인정한다. 22세 때 파리로 나가 그림 공부를 했다. 30대 중반에 친분이 있던 피카소 등과 함께 야수파 운동에 참가하여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다음 그림은 1937년 작으로 캔버스 유화이며, 작품명은 ‘보라색 코트를 입은 여인(Woman in a purple coat)’이다. 그림속 주인공의 이름은 리디아 델렉터스카야(Lydia Delectorskya)로 마티스의 비서였다. 마티스는 그녀를 얼음 공주라 불렀으며, 긴 금발머리, 파란 눈과 고운 피부를 가졌다고 한다. 보라색 줄무늬 코트와 노란 색 꽃이 있는 꽃병과 과일들의 색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시선을 사로 잡는다.

마티스
앙리 마티스의 '보라색 코트를 입은 여인', 1937년 작

이 그림은 단순한 모델을 그린 그림이 아닌, 색과 빛을 사용하여 삶 자체에 대한 감정을 표현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림에서 꽃병과 탁자, 장식들이 두터운 윤곽선으로 둘러싸여 보라색 코트를 입은 그림속의 여인이 금방이라도 일어서서 걸어나올 것 같은 입체감을 제공한다. 이 그림 외에도 리디아를 모델로 한 다른 그림으로 1937년 작인 ‘보라색 드레스와 아네모네’와 ‘파란 드레스를 입은 여인’ 등이 있다. 

마티스는 리디아를 모델로 100점에 가깝게 그림을 그렸으며, 드로잉과 스케치 작품은 이보다 더 많다. 그녀는 마티스가 죽을 때까지 그의 옆에 있었다. 

대표적인 다른 그림으로는 ‘분홍 담벼락’(1898년 작), ‘사치, 평온, 쾌락’(1904년 작), ‘모자를 쓴 여인’(1905년 작), ‘삶의 기쁨’(1905-1906년 작),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자화상(1906년 작)’, ‘춤’(1910년 작), ‘이카루스’(1946년작)와 ‘블루누드 2’(1952년작) 등이 있다.

 

- 에필로그

이 기사를 작성하면서 수많은 명작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들의 삶을 조금은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다. ‘시선을 사로잡은 베스트 10 명화산책’이란 제목을 달았지만, 어찌 베스트 10으로 수많은 예술가의 작품을 말할 수 있을까. 한 작가의 작품도 수백 편에 이르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인 줄 알지만, 제한된 지면에서 기사를 소개해야 했기에 10편으로 한정했다. 여기에서 언급되지 않은 많은 작가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다.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도 한 점도 소개하지 못했다. 그림을 보고 많은 사람들을 울게 만드는 마크 로스코를 비롯하여, 자신이 겪은 사고 후유증에 의한 삶의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멕시코 여류 화가 프리다 칼로도 있다. 자신의 조각품인 1947년 작 ‘가리키는 사람’ 조각이 뉴욕 경매에서 거의 2천억 원에 낙찰되어 제일 비산 조각품 기록 보유자인 스위스의 조각가이자 화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조각품도 있었다.

이 모든 예술품을 휴스턴 미술관이 소장하도록 가능하게 만든 것은 수많은 후원자들과 오일머니 덕분이다. 휴스턴은 세계적으로 석유 산업이 발달한 도시로, 이는 휴스턴의 경제적 자원과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석유 산업 발전으로 인해 휴스턴은 많은 부유한 사업가와 기업들이 위치한 중심지가 되었고, 이들이 문화 및 미술 활동에 후원을 제공할 수 있었다.

휴스턴미술관은 지역 내외의 많은 후원자들로부터 장기간에 걸쳐 후원금을 받아왔다. 석유 산업 관련 기업들과 부유한 개인 후원자들이 특히 미술관의 컬렉션을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이들 후원자들은 자신의 재정적 자원을 활용해 미술 작품 구매와 전시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휴스턴은 지속적인 경제적 성장과 함께 문화적 발전도 이루었다. 이는 도시 전체적으로 문화 시설 확장과 개선을 촉진했고, 특히 미술 및 문화 기부 문화를 지지하는 환경을 조성했다. 따라서 휴스턴미술관이 고가의 미술품들을 소장하고 전시할 수 있었던 것은 석유 산업의 경제적 기반과 다양한 후원자들의 지원이 결합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멋진 삶을 살고 위대한 예술품을 남기고 간 예술가들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많은 기업 및 후원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산책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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