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에는 일반적으로 학창시절 은사나 직장 상사, 사회 저명인사를 주례로 모신다. 예식장에서 전문 주례사를 주선해 주기도 한다.
내 생애에 일곱 번의 주례를 섰다. 주례 부탁을 받으면 우선 반갑긴하다. 그가 나를 인생 선배로서 존경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앞선다. 신혼부부에게 어떤 훌륭한 조언을 해줄 것인가 고심이 앞선다. 그간 쌓은 인생 경륜과 습득한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고 정수를 뽑아 주례사를 작성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자의 치마 길이와 주례사는 짧을수록 좋다고들 말한다. 분주하고 시끄러운 혼례식장에서 길게 늘어놓는 고리타분한 주례사를 귀담아 듣는 이가 많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나는 기본적인 신랑신부의 소개와 축하말,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길 기원한다는 인사만 하고 끝맺는다. 대신 신혼부부에게는 알토란같은 내용의 축원과 당부, 고언을 담은 주례사 내용을 따로 전한다. 신혼여행 가는 비행기에서 두사람이 같이 읽으며 혼인의 뜻을 새기고 각자의 의무를 다질 것이다.
양가 어머니가 먼저 레드카펫을 밟고 지나가 초에 불을 붙이는 것은 아마도 이벤트성 행위일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어머니가 아닌 신혼부부다. 레드카펫은 그들만이 지나가야한다.
또한 신랑이 들어가면서 양가 부모에게 큰절을 하고 들어가는 것도 마뜩치 않다. 물론 자신과 배필을 키워준 부모께 감사의 예를 다함은 미덕이다. 오늘은 뭐니뭐니해도 신혼부부 두 사람이 주인공이다.
요즘 유행하는 주례없는 결혼식은 또 뭔가? 예로부터 혼인은 인륜지대사라 했다. 가정을 이루는 두 남여의 평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행사다. 본질을 망각하고 이벤트성 일탈이 마치 특별한 것인 양 유행처럼 번져감은 심히 유감이다.
주례 대신 양가 아버지가 나와서 하객들에 대한 인사겸 주례사 비슷한 당부를 신랑신부에게 해주는데 그걸 공개적으로 한다는 건 하객들에게 자신의 유식을 자랑하는 것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그런 당부라면 궂이 혼사때 남들 앞에서 하지 말고 집에서 둘의 손을 잡고 진중히 하면 되지 않는가. 더하여 좌중을 웃기려 유머까지 가미하니 신성해야할 혼례가 희화화되는 느낌이다.
존경하는 은사나 어른을 주례를 모시는 것은 그만큼 엄숙하게 혼인을 치르며 부부로서 서로의 임무를 새기고 각오를 다지는 일이다. 혼인을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어떠한 고난도 이겨나갈 마음가짐이 생긴다. 세태 탓도 있겠지만 장난기 섞인 이벤트성 혼례식에 그런 각오나 다짐이 끼어들 틈은 없어 보인다. 조금만 삐긋하면 서로가 참지 못하고 갈라서자는 말이 쉽게 나온다.
이건 내가 주례를 못 서서하는 하는 불평은 절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