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민족시인 ‘상화' 생가터 "수수꽃다리가 지키고 있었네"
[탐방] 민족시인 ‘상화' 생가터 "수수꽃다리가 지키고 있었네"
  • 노정희
  • 승인 2019.04.22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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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화 고택에서 머잖은 곳에 자리한 ‘상화 생가터’
수문장처럼 200년을 버티고 선 수수꽃다리
대구시 중구 서성로13길 7-20
200년 된 수수꽃다리
200년 된 수수꽃다리

대구는 문향의 도시이다. 일제강점기에 민족 시인들도 그러하거니와 한국전쟁 중에도 전국의 작가들이 모여 전시 문학을 키운 지역이다. 우국 시인들의 집합 장소이기도 한 대구에 내로라할 문학관이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다른 도시에 들릴 때마다 그 지방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생가터나 문학관이 번듯하게 자리한 것을 보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대구를 대표하는 시인을 꼽자면 당연히 이상화 시인이다. 상화 고택은 눈에 훤해도 상화 생가터가 고택 부근에 있다는 것은 생소하다. 생가터가 있다면 문학사적 가치가 클 것이다. 대구시와 대구의 문인이 참여하여 시인의 발자취를 복원해야 마땅하다.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긴가민가 동요가 일었다. 좁은 골목을 돌아 어느 지점에 맞닥뜨렸을 때 화려한 물감으로 그려진 벽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세웠다는 ‘이상화생가터’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벽화를 따라 들어선 골목 안 집에 들어서자 세월의 무게를 친친 감고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마당을 차지하고 있다. 굳은살이 박인 나무, 꽃은 이미 지기 시작했다. 적잖은 나이를 먹었음이 눈에 보인다. 파란과 역경의 세월을 고스란히 안고 있을 그 나무가 고요해서, 너무 고요해서 안쓰럽다.

나무는 새로이 주인을 맞이했다. 보살펴주고, 영양제 주사로 건강을 살펴준 주인의 품새를 읽어 편안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마당에 수수꽃다리가 있는 집, 상화 시인의 생가터라고 한다. 전율이 흐른다.

상화 생가터 입간판
상화 생가터 입간판

 

'라일락뜨락 1956' 대표 권도훈 씨
'라일락뜨락 1956' 대표 권도훈 씨

대구시 중구 서성로13길 7-20에 위치한 ‘라일락 뜨락 1956’의 한옥 카페를 운영하는 권도훈(48) 씨와 자리했다.

-번듯한 장소도 많은데 굳이 한옥에 카페를 만든 연유가 있는지요.

▶전에는 산업디자인 회사를 운영했습니다. 산업 그래픽 디자이너였지요. 워낙 커피를 좋아해서 커피를 찾아다니며 마셨습니다. 핸드드립 커피 강좌가 있어서 재미 삼아 배우다가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땄습니다. 회사 사무실 한편에 카페 공간을 만들어 손님이 오면 직접 내린 커피를 대접했지요. 반응이 좋았습니다. ‘디자인처럼 커피도 운명이구나’ 싶더군요. 디자인 작업실과 카페를 겸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개인적인 성향인지, 마당 있는 집이나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골목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세월의 더께가 남아 있는 공간을 보면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아 친근해집니다. 근대 골목을 많이 돌아다니고 ‘골목 투어’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습니다. 그러던 중 대구시청에서 마련한 도심 재생 관련 교육을 받은 것이 한옥 카페 차리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좁은 골목을 거쳐서 들어와야 하는 이곳을 꼭 선택했어야 했나요.

▶처음에는 ‘상화고택’이 상화의 생가인 줄 알았습니다. 근대 골목 투어에 참여하고 난 후 상화 생가가 고택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택은 상화가 돌아가시기 전 4년 동안 기거한 공간이고 이곳 생가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지요.

이 집은 4년 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빈집에 홀로 서 있는 라일락 나무를 보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한눈에 반했습니다. 백방으로 애써서 ‘라일락 나무가 있는 집’을 구매했습니다.

-라일락 나무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보는지요.

▶이곳의 라일락 나무는 우리나라 암흑기를 지켜보았습니다. 나무는 몸으로 말을 했습니다. 온몸을 비틀어 둥치를 키우고 가지를 뻗고 꽃을 피웠습니다. 나무 자체가 역사인 셈이지요. 상화 시인도 이 나무 아래에서 감성을 키우지 않았을까요.

라일락 나무의 건강 상태와 나이가 궁금해서 평소 알고 지내던 식물연구가에게 나무의 나이를 물어보았습니다. 150~200년 정도 추정된다고 합니다. 수령이 200년이라면 이 나무는 뿌리 내린 지 100년 만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족 시인의 탄생을 지켜본 것이지요. 상화가 떠난 지 오래지만, 나무는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상화 시인에게 관심을 가지자 지역의 한 시인이 상화 생가를 그린 조감도를 발견하고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 자료에 따르면 생가 안채에 라일락 나무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나무입니다. 자료에 대한 검증이 더 필요하겠지만 카페 공간은 상화 생가의 안채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카페 이름에는 무슨 뜻이 담겨있습니까.

▶ ‘라일락뜨락 1956’는 1956년에 지어진 한옥 마당에, 라일락이 있는 집이라는 브랜드네임 입니다. 골목이 좁아 자재를 손수레와 손으로 옮겨야 했고, 5개월 여 공사 기간을 거쳐 작년 10월 15일에 문을 열었습니다.

상화는 1901년 4월 4일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1956년에 11번지가 4곳으로 분할이 되었고 ‘라일락뜨락’은 11-3번지인 이상화 생가 안채에 위치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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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배치도

 

상화 벽화를 그리는 권도훈 씨
상화 벽화를 그리는 권도훈 씨

 

상화를 그리워하며

상화는 1901년 4월 5일에 태어나 1943년 운명했다. 시인이 떠난 지 76년이 흘렀다.

상화는 7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의열단 이종암 사건에 말려들어 구금되기도 했다. 스물여섯 청년 시절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친형인 이상정 장군을 만난 이유로 5개월 정도 옥살이를 했다. 1937년 이후 교남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는데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여 권투부를 만들었다.

상화는 50여 편의 시와 10여 편의 산문을 남겼지만, 생전에 시집 한 권 내지 못했다. 훗날 백기만이 상화와 고월 이장희의 시를 한데 묶어서 『상화와 고월』 유고집을 내었다.

독립기념관에 모신 민족시인 중 문학관이 없는 분은 상화뿐이다. 대구의 대표 시인의 문학관이 없다는 것은 애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