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년에 작가이며 지식인이던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소수의 열광과 다수의 외면을 받은 이 지식인은 한 평생 외설적 음란물 작가라는 주홍글씨를 등에 붙이고 살았다. 이제껏 냉소와 성도착증 환자로 일관되게 낙인찍어, 희화했던 주류 언론과 문학계가 돌연 그의 부고장을 보고는 호의적 태도를 들어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나 다를까 단번에 검색어 1위에 올랐다. 고인의 해맑은 얼굴에 덧칠을 하여 희화보다는 시대의 희생자로 다시 부활을 꾀했다.
그 지식인의 지인들은 고인에 대해 ‘한국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며, 자유주의자였고 방식의 차이 때문에 공격을 받으면서도 위선을 비판한 작가’라고 평가한다. 오래전 필화사건 이후 문학계는 고인을 사실상 왕따로 만들고, 투명인간 취급을 해왔다. 감내하기 힘든 시간들을 고인은 자신이 안고가야 할 업보로 수용했음직하다. 알아줄 세상을 염원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제자와 지인들은 고인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 입을 모으고 있다. 지금 유튜브(youtube)에선 고인의 순진함과 순수함을 오히려 비웃을지도 모를 일이다.
출판 당시 일본에서 번역된 「즐거운 사라」는 한 때 베스트셀러 반열에도 올랐다. 적반하장 격으로 우리 언론들은 표현의 자유가 매우 협소하게 적용한 결과라며 당시의 사법부를 꾸짖고 나섰다. 고인이 된지 1년도 안된 시점에, 어느 일간신문의 표제어가 어안을 벙벙하게 만든다. 어느 신문은 ‘매력 연극 4편’이란 제목에 ‘마광수 교수의 유작극화(遺作 劇化)’를 소개하면서 ‘연말 공연장에서 다양한 장르의 연극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라고 소개 했다. 제목은 ‘교수와 여제자 3’로 뽑았다. 우스꽝스런 작태다. 어느 국문학과 교수는 ‘돌이켜 보면 그 교수는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고교 때 친구의 어머니인 교사를 사랑해 결혼까지 한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같은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면 우리 언론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패륜으로 정계은퇴는 물론이요 인격적 모욕으로 세상을 등지게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앞서 한 발짝 나아가면 불화가 일고, 반 발짝만 앞서야 동시대와 야합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예술과 문학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반드시 한 발짝 앞서가야 한다. 그래야 다양성과 진보를 맛볼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다. 외래종 황소개구리만 득실 되는 연못은 연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미꽃이 예쁘다고 온 산천을 장미꽃으로 채운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아름다울까. 그저 생각만 해도 끔직할 따름이다. 무엇이던 밑둥치가 넓어야 넘어지지 않는 법이다.
시대의 경계를 넘어선 창의적 소유자는 그만큼 사회와 시대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현대음악'도 마찬가지였다. 스트라빈스키 대표작인 '봄의 제전'도 1913년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했을 때 난장판이 되었다. 낯선 음악에 화난 청중이 물건을 마구 던져 경찰이 출동할 정도였다. 뛰어난 창의력을 가진 작가나 예술가 지식인의 뒷모습이 부럽기는커녕 오늘따라 마음을 아프게 한다. 왤까?
고인의 불운한 삶들을 돌이켜보면서 불현듯 떠오르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다. 금세기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우라’의 개념을 대중문화에 도입한 문예비평가요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박사학위 취득 후 프랑크푸르트대학에 교수취임 자격논문(Habilitation)을 제출하였으나, 독일민족의 우월성을 찬양하지 않고 비하했다는 이유로 논문심사에서 탈락했다. 아리안족(族)(게르만족)이 지구상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인데 이걸 비하했으니, 히틀러 수하의 어용교수들에겐 괘씸죄로 엮어내기에 적격이었다. 반 발짝이 아니라 한 발짝 앞으로 나간 것이 문제였다.
그는 어느 하나의 장소나 위치를 점유함으로써 영향력 있는 지식의 권력자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끊임없는 위치를 이동하고 시선을 바꾸며 글쓰기의 패턴을 바꾸며 매번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내려고 시도하였다. 그가 원했던 것은, 분류 불가능한 것들의 존재를 분류 가능한 것으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획일화를 강요하는 당대 사회 이데올로기에 실망한 그는, 소위 ‘메모 덩어리’로 불리는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전념했다. 훗날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연구에서 우리에게 지금은 친숙한 ‘아우라(Aura)’란 개념을 선사한 바 있다.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은 세계사적으로 놀라운 일을 저지른다. 극과 극인 공산주의자와 나치즘이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이다. 이것은 벤야민에게 지적 혼란과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유태인출신이었던 벤야민은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급히 파리로 피신했다. 망명지에서도 ‘아케이드 프로젝트’ 연구를 계속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순혈주의 학자였다.
그 당시 절친한 동료였던 아도르노는 이미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상태였다. 그는 벤야민에게 미국비자까지 건네주며 미국 망명을 권유했다. 신변이 위험하다는 이유였는데. 하지만 벤야민은 처음에는 ‘유럽의 마지막 지식인으로 남겠다.’ 라며 거절했지만 곧이어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망명을 결심한다.
그 당시 파리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프랑스 해안 전체가 봉쇄 되었기에, 스페인으로 건너가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다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는 행로 하나 뿐이었다. 피레네 산맥을 통과하기 위해 벤야민은 몇몇 사람들과 함께 국경으로 향했다. 하지만 국경에 도착하기 하루 전 날 청천벽력 같은 전언을 듣게 된다. 스페인은 당시에 나치와 파시스트에 가까운 프랑코가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경 봉쇄령이 내려진 것이다. 이 봉쇄령은 곧 그가 탈출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벤야민은 주머니 속에 갖고 다니던 모르핀을 꺼냈다. 말(馬) 한 마리를 죽이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여기서 그는 비극적 생을 마감한다. 평생 우정을 나눈 친구 숄렘은 벤야민의 무덤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그의 진가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유럽 정신은 최고의 지성이자 유럽 정신의 계승자인 대가(大家) 한 사람을 잃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의 진가를 알았던들 신경이나 썼을까? 나는 벤야민 같은 인물이 이 세상에 다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나온다고 할지라도, 유럽의 토양은 그와 같은 정신을 소유한 자에겐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자살이라고 하는 단어가 단순히 벤야민 개인의 마지막 불행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 발짝 앞선 자에게 자살은 인류의 이성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인 작가 사이드(Edward Said)가 쓴 책 「권력과 지성인」에는 지식인에 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지식인은 자기 스스로를 경계 밖으로 추방해서 경계 밖에 서서 경계 안에 있는 제도와 관습을 관찰하고 고발하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는 자이다. 지식인은 경계 안에 있으면 안 된다. 제도권 내에 있으면, 어떤 이데올로기의 하수인이 되기 십상이다’
벤야민 묘지를 둘러싼 조각품이 그가 그토록 탈출을 원했던 피레네 산맥에 지금도 그대로 놓여있다. 묘지는 바다를 향해있지만 유리 조각품으로 가로막혀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자유를 얻기 위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벤야민은 죽어서 그 바다는 볼 수 있지만, 바다를 건널 수는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가슴이 아릴 뿐이다. 벤야민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문명의 기록은 야만의 기록 없이 결코 오지 않는다.’(There is no document of civilization which is not at the same time a document of barbar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