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고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가훈은 집안의 등대입니다”
지하철 역사에서 시민들에게 가훈을 써 주는 금빛 봉사자가 있다. 금년에 칠순을 맞은 서예초대작가 소담(笑潭) 권혁동(權赫東·69·소담서예연구원장)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항해자가 등대를 응시하듯, 우리네 가정들도 가훈을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무료로 가훈을 보급하고 있다.
권 작가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서예도구를 챙겨들고 집을 나선다. 지하철 역사에서 하루에 그가 만나는 사람은 수백 명, 매일 100점 이상의 가훈을 써주고 있다. 이렇게 쓴 가훈이 5년 동안 20만 점이 넘는다.
그동안 이런 재능기부를 서울 지하철 역사 위주로 해 온 그가 대구 지하철 1호선 반월당역 개찰구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선행이 지방에까지 전해져, 드디어 대구 시민들이 그를 초청한 것이다. 지지난 주에 와서 하고 갔는데 추가 요청 전화가 빗발쳐서 다시 왔다고 한다. 이번 주는 어버이날이 끼어, 찾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한 장소에서 보통 일주일씩 한다. 당일 와서 보고 간 사람이 다음날 다시 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대구에는 이번 토요일 오후 7시까지 하고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다. 그러나 언제든 또 내려올 수 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일요일에는 자신이 출석하는 서울 동대문구 동안교회 교우들에게 재능기부를 계속한다. 성경구절로 된 가훈을 써 주기도 하고 미리 만들어 간 가훈을 나누어주기도 한다.
권 작가는 평생을 공직에서 일했다. 국세청, 사설 우체국 등을 거쳐 서울교통공사에서 정년퇴직했다. 그 후 다시 한전에 들어가 6년을 근무한 후 모든 직장 생활을 끝냈다. 더 이상 그를 찾는 데가 없었다. 그래서 여생을 봉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직업과 관련되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한 끝에 '가훈쓰기' 재능기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우선 장소가 필요했다. 시민들과 쉽게 접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을 찾았다. 지하철역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지하철 역사에서 가훈 써주는 일을 하기로 했다. 자신의 직장이었던 '지하철'과 자신의 취미인 '서예'의 절묘한 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경북 안동 선비 가문에서 태어난 권 작가는 집안 어르신들이 붓글씨 쓰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그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붓과 친해지게 되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이사했지만 붓을 멀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예를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어 중년의 나이에 '춘엽 윤중노' 선생을 만나 사사를 받았다. 취미생활로 붓글씨를 써오던 그가 각종 대회에 입상하더니 급기야 초대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렇게 익힌 서예가 인생3막에 뜻밖에도 귀하게 쓰일 줄을 그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
처음 봉사하기로 다짐하고 친정인 서울 지하철역 사무실을 노크했다. 다행히도 어린이대공원역에서 장소 사용을 승인해 주었다. 이렇게 시작한 자원봉사의 길에서 후배인 김태수 서울시의회 의원을 만났다. “선배님, 이왕 하실 거면 번듯하게 한번 해봅시다.” 김 의원은 권 작가와 함께 ‘전국 가훈 써주기 운동본부’를 설립했다. 그 후 권 작가의 재능기부는 탄력을 받아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영리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스트레스라는 게 없어요. 제 적성에도 맞고 제가 잘할 수 있는 일로 즐겁게 봉사할 수 있어 정말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시니어 봉사자 권 작가는 지하철 역사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다. 우연히 지하철역을 지나가다 그가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를 초청하는 곳이 늘어났다. 그래서 기업, 학교, 전주 한옥마을 등에도 다녀왔다.
“반응이 너무 좋은데 다 맞춰주지 못해 늘 아쉽습니다.” 그는 잘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언제나 최상의 봉사를 하고자 노력하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감동한다.
시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가훈이 뭐냐고 물었다. 망설임없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대답했다. “이만한 뜻이 담긴 가훈 없습니다. 아직도 가정의 소중함에 대한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어르신들이 많다는 증거죠.”
‘일근천하 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도 그가 추천하는 가훈이다.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
가훈을 미처 정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견본으로 좋은 가훈 100여 개를 뽑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시민들은 이들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면 된다.
권 작가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훈은 ‘서기만당(瑞氣滿堂)’이라고 했다. 상스러운 기운이 집안에 가득하길 바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는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국제교류서예대전에도 참여하고 있다. 때로는 시를 가훈처럼 쓰기도 하고 한자를 그림 모양으로 쓰는 서화에도 조예가 깊다. 서화협회 주최 서예대전에서 본상에 선정되었을 때 가장 기뻤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구입한 화선지에다 무료로 가훈을 써 주고 있다. 족자에다 맵시 있게 쓰기를 원하는 사람에겐 실비 정도로 재료비를 받는다. 멀리서 전화로 요청하는 사람에겐 작품을 만들어 택배로 보내주기도 한다.
시니어 봉사자 권혁동 작가는 오늘도, 무너져가는 가정을 세우는 일에 동참한다는 자부심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남은 사명을 감당해 나가고 있다.
연락처: 010-8316-6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