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군에서는 지난 2017년『예천유학사』,『예천의 효열』,『예천 지명유래』세 권의 책자를 발간하며 ‘충효의 고장 예천’이라는 지역 정체성 확립에 나섰다.
책자는 자라는 청소년 및 출향인과 군민들에게 예천인이라는 애향심과 자긍심을 가지고자 발간됐다. 이와 관련 임지한(林支漢) 장군을 제향(祭享)하였던 의충사(毅忠祠)는 예천뿌리 찾기에서 제외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의충사(毅忠祠)는 대창중고등학교 서남쪽 언덕 위(예천읍 노상리 59-3번지, 노상리길 27-3, 예천군 소유)에 있던 사당으로 예천인 임지한(林支漢) 장군을 제향(祭享)하였던 곳이다.
임지한(林支漢)은 예천읍 서본리 출신으로, 본관은 예천이다. 고려 원종(1260-1274) 때에 예천군의 관리로서, 사무를 보는 틈에도 늘 병법책을 읽었으며 항상 일찍 출근하였다. 또한 호랑이를 길들여 타고 다녔다고 전하기도 한다. 마침 경주에서 최종(崔宗), 최적(崔積), 최사(崔思)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에 임명하여 난을 진압케 했다.
임지한은 청송 주왕산에 만여 명의 병력을 모아놓고 이웃 고을 수령을 죽이고 곡식을 약탈하고 서울로 쳐들어가려 하는 최종(崔宗) 무리들을 싸움 한번 없이 병법으로 무사히 평정하고 개선하자, 원종 임금이 삼중대광 벽상공신으로 삼았다. 그러나 임지한은 벼슬을 사양하고, 상주 관내의 다인현(多仁縣)을 예천으로 옮겨 속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의충사(毅忠祠)는 고려 원종 때 원수 임지한(元帥林支漢)과 조선 때의 창원부사 황사성(昌原府使黃士誠)을 제사 지내다가, 1715년(숙종 41)에 재건하여 1868년(고종 5)에 헐리고, 1898년(광무 2)에 고을 사람들이 다시 세워 조선 말 의사(義士)이며 군 관리(郡官吏)였던 정대일(鄭戴一)을 추가로 제향하여 보존해 오다가, 1978년에 집중 폭우로 붕괴되고 터만 남아 있다.
의충사(毅忠祠) 오른편에 두 그루의 감나무와 왼쪽에 소나무 한 그루, 그리고 그 옆에 대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의충사유적지(毅忠祠遺蹟地) 비(碑)와 소나무 한 그루만 남아 있다.
현재 의충사(毅忠祠) 관리는 이장우(노상리길 25-3)씨를 비롯한 인근 주민들이 그냥 방치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풀베기 등을 하고 있다. 또한 이곳이 과거 임지한(林支漢) 장군을 제향(祭享)하였던 곳인지를 인근 주민을 제외하고는 알 수 없어 지역 문화재 관리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와 관련 주민들은 예천군에서 문화유산 보존과 지역 정체성 확립을 위해 의충사 복원이 안된다면 안내판이라도 설치하여 이곳이 의충사(毅忠祠) 유적지란 것을 알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