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동창회 다녀온 후에 시무룩해 있어 남편이 물었다. 친구가 외제차 타고 왔더냐고 물었다. 대답이 없어 다시 물어보았다. 그럼 남편이 명품백 사 줬다고 자랑이라도 하더냐고 물었다. ‘인정투쟁’을 당한 아내에게 남편이 우회적으로 묻고 있는 코믹한 장면이다. 모임에 나가보면 남자들은 자동차로 자신을 과시하는 경우가 적잖다. 자동차가 곧 자신의 분신이기에 자동차의 급에 맞추어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고급 메르세데스 벤츠를 타고 왔으니 내가 곧 벤츠야. 당신이 알아서 나를 대우하라는 뜻으로도 들린다. 급에 맞게 나를 인정해달라고. 어쨌든 내 정체성을 알리려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아야만 하니 별 도리가 없다는 심사가 깔려있다. 애잔한 자화상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지만, 어찌하겠는가, 현실인 것을.
누구나 불행을 느끼는 요인은 많지만, 다른 이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결핍이 그 한 가운데 놓여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능력, 재력, 외모, 정체성에서 느끼는 결핍은 사람에 따라 치명적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자신을 늘 의식하고 있다는 증표다. 자존심, 만족감, 행복감도 이러한 ‘자기의식’의 척도에 따라 가치를 구획하고 등급화하려 든다. 이런 척도로 인해 스스로 행복이나 불행을 느끼기도 하고, 이걸 채우기 위해서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갈구하기도 한다. 철학자 헤겔(Hegel)은 이런 인간의 심리를 ‘인정투쟁’(recognition struggle)이라 부른다.
‘인정투쟁’이란 도대체 근원적으로 어떻게 어떤 연유로 생겨나게 되었을까? 헤겔에게서 그 실마리를 풀어본다. 그에게 ‘인정투쟁’은 자신의 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정-반-합’의 변증법 과정도 인정투쟁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란 우화적인 시나리오를 통해 인정투쟁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자유를 망각한 채 주인에게 헌신하는 삶이 자신의 목적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노예는, 자기의식이나 인정투쟁의 과정을 통해 ‘자유를 자각할 때만’ 주인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더듬어 찾아가는 과정과 다름이 없다. 자신에게 주인 됨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자기 의지대로 실현하는데 있다면, 이것은 주장함으로써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게 핵심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주체들 간에 이른바 ‘인정 투쟁’이 불가피하게 벌어지게 된다. 싸움은 필시 승자와 패자를 낳고 만다. 목숨 건 싸움이기에 진 사람은 죽어야 하지만, 승자는 패자를 죽이지 않는다. 왤까? 승자가 주인의 지위를 누리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승자임을 보증해줄 수 있는 패자의 증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자는 패자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에 그를 노예로 삼는다. 자기 옆에 노예가 있어야 승자는 자신이 주인 됨을 인정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누구든 인정받으려면 타자의 존재가 필수적임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누구든 인정받으려면 타인의 존재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 있다.
주인과 노예 중에서 누가 자유로울까?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주인이 자유로울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주인이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물을 지배하고 노예를 부림으로써만 자유롭다면 불완전한 자유이다. 주인은 그저 노예에게만 일을 시킨다. 노예는 삽질하고 땅을 파고 밭을 갈고 물건을 만든다. 그렇다면 노예가 어떻게 주인보다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어떤 계기로 말이다.
노예가 자기 스스로 자신의 가치,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계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헤겔은 노예가 힘을 들여 만든 ‘생산물’을 그 계기로 봤다. 예컨대 노예가 근사한 도자기를 하나 만들었다고 가정하자. 밤낮없이 노력한 결과 수려한 도자기를 만들어냈지만 노예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기 손으로 만든 도자기, 하지만 노예에게는 도자기에 대한 아무런 권리가 없다.
반면 도자기는 주인의 집 잘 보이는 곳에 놓여 호사를 누린다. 헤겔에 의하면, 노예는 이 때 자신이 만든 도자기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인데. 생산자가 생산물보다 더 못한 대우를 받는 현실, 인간으로서 가치와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자기의식’을 되찾은 노예는 주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 시작된다는 것인데, 이것이 곧 헤겔이 말하는 ‘인정투쟁의 원초적 설명’이다. 자신의 권력 강화가 아니라, 주인으로부터 정체성과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다. 주인과 노예, 둘 다 인정투쟁의 당사자인 동시에 대상자임을 헤겔은 말한다.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에 노동자들은 ‘산업역군’ ‘산업전사’로 불렸다. 그런데 이 영웅들은 당시 어떻게 취급되었을까? 저임금 장시간 노동과 높은 산업재해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은 인간이라기보다 기계였다. ‘83년 입사 때 주야 2교대, 한 달에 2일 쉬고, 월급은 13만원, 전주대 1개를 16만원에 납품했다. 한 달에 전주대를 몇 백 개 만들어도 내 월급은 1개 값도 아니더라.’ 이처럼 개발독재는 성장을 위한 소품으로 노동자들을 다루었다. 따라서 이들은 작업장에서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다. 공돌이와 공순이로 통칭해서 불렸을 뿐이다. 생산물을 산출하는 자는 생산물보다 ‘더 나은 가치’와 ‘더 나은 존재론적 지위’를 지녀야한다. 그런데 생산물보다도 존재론적 지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 상황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신경숙의 자전적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열여섯의 나, 대꾸하지 않는다. 납땜 연기가 싫은 것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우리는 숙련공으로 되어갈수록 외사촌과 나의 이름은 없어졌다. 나는 스테레오 반(班)의 A라인의 1번이었고 외사촌은 2번으로 불리었다. 작업반장은 외친다. “A반 1번 뭐하는 거야? 작업이 끊기잖아.” 내 이름은 없다. 열여섯 해 동안 불리어지던 내 이름이 사라졌다.’
노동자들은 이름 없는 기계로 취급되었고,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무시에 대한 자각은 깊은 분노로 그리고 저항의 자양분이 되었다. 이즈음에 인정투쟁의 조짐이 조건반사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투쟁의 동기를 자기보존이나 자신의 권력 강화에서 찾는 것은 헤겔의 의미에서 볼 때 인정투쟁의 본질에서 벗어나며,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기위한 투쟁’이어야 한다. 헤겔이 말하는 인정투쟁의 본질과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한 인정투쟁의 젓줄이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먼 해원을 향해 도도히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미국에서 일본인 3세로 책 한 권을 써서 단번에 세계적인 석학으로 발돋움한 학자가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이다. 그가 쓴 책 중에 ‘역사의 끝과 최후의 인간’(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이란 책이 있다. 이 책에서 후쿠야마 교수가 주장하기를 인류의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두 가지 동기가 인류사를 발전시켜 왔다고 지적한다. 첫째는 물질적으로 좀 더 잘 살아보겠다는 ‘물질적 동기’이다. 둘째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동기’라고 하였다. 물질적 동기 내지 경제적 동기에 대하여는 구태여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인정받고자 하는 동기를 후쿠야마 교수는 ‘인류의 인정투쟁’이라 표현하고 있는데, 사람은 본성상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을 때에 삶의 보람을 느끼고 행복감을 느낀다. 반대로 인정받지 못할 때에 불행을 느끼고 의기소침하게 되며 삶에 대한 의욕마저 잃게 된다. 그래서 인류는 기나 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하면 개인들로 부터나 공동체로부터 인정받으며 살 수 있을까에 대하여 생각하며 투쟁의 길을 걸어 왔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