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있어서 죽음은 필연적인 일이다. 죽음은 언제, 어떤 형태로 올지 아무도 모른다. 삶이 있는 곳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 삶이 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한다. 죽음을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남의 일인 것처럼 여긴다. 죽음은 슬프고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심리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죽음에 대한 슬픔과 두려움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을 보내는 사람도 느끼는 감정이다. 특히 죽음이 슬픈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 함께 있던 사람과 이별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나쁜 이유는 죽고 나면 삶이 가져다주는 모든 축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기 때문이라는 박탈이론도 슬픈 이유의 근거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부모의 죽음보다 자식의 죽음이 더 슬프다고 한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을 참척(慘慽)이라 한다. 참척의 슬픔과 고통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어미 원숭이의 창자가 끊어졌다는 모원단장(母猿斷腸)이나 너무 슬퍼 눈이 멀었다는 상명지통(喪明之痛)의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다산 정약용은 아홉 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 중 여섯 명의 아이가 천연두로 어린 나이에 죽었다. 한창 재롱을 피우며 밝게 웃던 아이가 새카맣게 타들어가며 죽은 것이다.
당시 많은 부모와 아이들이 홍역과 천연두로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의료 지식과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였으니 기껏 굿을 하거나 기도를 하는 것 외에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다산은 세 가지 기쁨을 준 아이라고 삼동(三童)이라고 부르던 한 아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유자삼동예명(幼子三童瘞銘)’이라는 글을 남겼다.
네 모습이 숯처럼 검게 타서, 귀여운 얼굴 다시 볼 수 없구나. 너의 얼굴 어렴풋하여 기억조차 어려우니, 우물 밑에서 별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였네. 너의 영혼은 눈처럼 깨끗하여, 날고 날아서 구름 속으로 사라졌구나. 구름 속은 천 리 만 리 멀기에, 부모는 줄줄 눈물만 흘린다네. |
그러나 다산은 슬픔에서 좌절하지 않고 고통 받고 있는 이웃을 생각했다. 그래서 홍역과 천연두의 증상과 처방에 관한 내용의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하였다. 자신의 고통이 이웃이 겪지 않기를, 자신과 같은 슬픔을 맞는 부모가 다시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다산은 유배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500여 권이나 되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종두설(種痘說)’에서 “내가 글을 쓰고 도를 배우는 것은 천하의 인명을 살리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죽음의 고통과 슬픔을 이웃 사랑, 인류애로 승화시킨 예라고 볼 수 있다.
티베트의 ‘사자(死者)의 서(書)’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는 울었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나는 웃었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슬퍼 울고 괴로워하였다. |
사람들은 탄생을 기뻐하고 죽음을 슬퍼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탄생을 슬퍼하고 죽음을 기뻐한다는 내용이다. 삶의 여정은 행복한 순간보다 고통의 시간이 더 많다. 따라서 탄생은 슬픈 일이고, 죽음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니 기쁜 일이라는 뜻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삶을 일주일에 비유하면서 “6일간의 혹사와 하루의 안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하루마저도 권태롭다”고 했다. 심지어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 행복인데, 태어났으니 별도리 없이 빨리 죽는 것이 제일 좋다.”라고까지 하였다.
이와 반대인 경우도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육체는 허울에 불과하며, 죽음은 영혼이 진리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로 가는 길이라 생각하고 오히려 죽음을 반가이 맞이하였다.
스위스 출신의 미국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는 “죽음은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다. 나는 죽음이 기다려진다”라고 하면서 조용히 그리고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특히 그녀는 수백 명의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다섯 단계의 정서적 반응을 보인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이를 그의 저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이라는 책에서 발표하였다.
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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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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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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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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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 |
① 부정(denial)
자신의 죽음을 거부하거나 부정한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검사가 잘못 되었을 거야” 하고 여러 병원을 찾아다닌다. 다른 사람이 물으면 별 일 아니라고 대답한다. 심해지면 다른 환자와 결과가 바뀐 것 아니냐며 의심한다. 자신은 나을 수 있다며 치료를 거부하기도 한다. 이때 시간적 여유를 갖고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② 분노(anger)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서 원망, 분노의 감정을 표출한다. 분노의 대상은 가족, 친구, 의사, 간호사, 신 등 가리지 않는다. “왜 나만 이러느냐”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나 질투 등의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어떤 것을 해주어도 분노로 연결되어 매우 다루기 힘든 상태이다. 환자를 무시하면 분노가 증가하므로 분노를 표출하도록 놔두는 것이 좋다.
③ 타협(bargaining)
상황이 더 이상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죽음을 미루려고 한다. “한번만 살려주시면 다음부터 정말 착하게 살겠습니다”라고 맹세한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하고 애걸한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거나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장기기증을 약속하는 경우도 있다. 환자의 절박함의 표시이며, 잠시 지나가는 단계이므로 이를 인정해 주고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④ 우울(depression)
“이젠 도저히 희망이 없구나” 하면서 죽음이 확실해지고 피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우울과 슬픔을 느낀다. 죽음 자체에 대한 슬픔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자신의 생에 대한 반성, 미래의 희망의 상실을 인지하고 더욱더 슬퍼한다. 이러한 우울과 슬픔은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에게는 삶을 정리하고 생각할 기회가 된다.
⑤ 수용(acceptance)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더 이상 죽음에 대하여 어떤 감정도 남아 있지 않으며, 분노하거나 우울해 하지도 않는다. 혼자 있고 싶어 하며, 평화로운 상태가 된다. 언어보다 무언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머나먼 여정을 향해 떠나기 전에 취하는 마지막 휴식의 시간인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과정과 심리 태도는 모든 사람이 다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몇 단계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 이론은 죽음의 경우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이별, 상실 기타 애도의 경우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톨스토이는 그의 저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판사인 주인공이 평소 평범하면서 일상적인 삶을 살아왔는데 갑자기 불치의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겪는 심리적 변화를 잘 표현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심리적 태도는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개인의 인구사회학적 특성, 건강상태, 심리특성, 가족환경, 사회적 지지 등도 죽음에 관한 태도에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효사상과 조상숭배사상의 영향으로 비교적 수용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죽음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갖게 되면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을 가지기 쉽다. 따라서 죽음에 직면하여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죽음은 필연적이며,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그 슬픔이나 두려움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