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10)
녹슨 철모 (10)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06.0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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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밤의 남산을 걷고 있었다. 단둘이 밤길을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많은 남녀 산책객이 산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들의 만남은 각자가 갖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호감의 정체를 탐구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 결과에 따라 둘의 관계가 새로 성립이 될 것이다. 

구석구석에 쌍쌍이 앉아 있어 이 둘은 마땅히 앉을 곳이 없었다. 태원은 겨우 한적한 곳을 찾아서는 그의 가방에서 책을 한 권 끄집어내었다. 그녀에게 그 위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녀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태원은 성격이 깔끔하여 책을 볼 때도 절대로 구기는 법이 없었다. 책장을 넘길 때도 항상 책장의 한 귀퉁이를 조심스레 들어서 넘기는 걸 자주 본 적이 있는지라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책을 통째로 내어 앉으라고 권하다니, 더구나 입만 열면 여자를 깔보는 소리나 하고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그의 교과서를 그녀의 방석으로 내어놓은 것이다.

이날 밤 길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둘은 서로의 속내를 확인하고 새로운 관계로 출발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둘은 남산을 내려와 신촌으로 갔다. 그녀의 학교와 하숙집이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의 뒷문 쪽에는 봉원사라는 절이 있었다. 이곳은 말이 서울이지 아직은 시골의 한 산자락에 지나지 않았다. 

신촌역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려 절 아래 길을 걷던 중 태원은 갑자기 병주를 끌어안았다. 다음 입술을 빨았다. 갑작스런 태원의 행동에 그녀는 무척 당황했다. 태원은 행동이 항상 자로 잰 듯 반듯하였고 늘상 예의범절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그 점이 그녀의 마음에 항상 좋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아무리 밤이지만 대로에서 남의 입술을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혼란에 빠진 그녀는 그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멍한 상태로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심정도 모르면서 태원은 그녀가 자기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단정하였다. 그 후 둘의 만남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태원의 입대 후에도 계속 이어진 것이다.

 

“실장님, 실장님.”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 받으라고 황 상병이 불렀다. 녀석은 예사 능구렁이가 아니어서 좀처럼 이런 호들갑을 떨지 않는데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보인다. 전화를 받으니 군단장 비서실장 현 중령이었다.

“실장, 지금 최대한 빨리 ‘불알 요롱소리’ 나도록 뛰어 ‘장님’(군단장 약칭) 집무실로 오시오.” 

그는 급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한 울타리에 살고 있다고 해도 하급 장교들은 별 셋인 군단장과 별 둘인 부군단장과는 얼굴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수요일 하기식 때 군단장 얼굴을 멀리서 한 번 보는 게 고작이다. 긴장되었다. 우 중위는 뛰어서 군단장실로 달려갔다.

“의무실장, 당신 이 사람 알아?" 

군단장이 어떤 준장 한 사람을 가리키는데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당신 아버지야!” 

이렇게 소개를 하자 그제야 눈치를 채고 병과 표시를 보니 군의관 휘장이었다. 별 달린 군의관이라면 군의감이 아닌가! 우 중위는 새삼 “멸공!” 하고 거수경례를 하니 모두 깔깔대며 웃었다. 

원래 군단장실에서는 사병이라도 다른 부대 장군이 와도 목례만 하지 구호를 붙여 거수 경례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 중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상급자만 보면 구호와 함께 거수 경례를 하였다. F.M(야전규범)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 중위의 이런 행동들은 모두를 웃게 하지만 한편 보병들에게는 그들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내가 말이야, 몸이 좋지 않다니까 이 양반이 이렇게 고맙게도 서울서 일부러 직접 왔네. 진찰은 끝났고 검사가 필요하다는 거야.” 

간단한 소개말 뒤 정작 중요한 진료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이미 채혈해둔 혈액과 소변을 주면서 군의감을 따라가서 검사 결과에 따라 약을 처방받아 오라는 지시였다. 군의감은 군단장 손님이었고 또 장군이므로 떠나는 그를 따라 관례대로 비서실 직원들인 비서실장, 수석부관, 전속부관과 인사참모, 주임상사 모두 현관으로 나와 서 있다. 

우 중위도 재빠르게 뛰어나가 대기하고 있는 승용차의 뒷문을 열고 기다리고 서 있었다. 군의감이 나오자 우 중위는 공손하게 그에게 먼저 타시라는 표시로 한 손으로는 문을 잡고 한 손으로는 안쪽을 안내하였다. 그러나 군의감은 차를 타지 않고 서 있었다. 우 중위는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어떤 이는 킥킥 웃기까지 하였다. 짧은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 군단장 비서실장 조 소령이 우 중위의 허리를 감고 승용차의 왼쪽 뒷문으로 데리고 가서 던지듯 밀어 넣었다. 그제야 군의감이 오른쪽 뒷문으로 차에 올랐다. 

군대 예절 교범 승차요령에는 상급자는 지프 차인 경우는 운전자 옆자리, 승용차인 경우 상급자가 뒷좌석 오른쪽에 앉게 되어 있다. 우 중위는 택시 타던 행동을 보였으니 아직도 아마추어 장교였다.

 

군단에서 서울 등촌동 수도통합병원까지는 한 시간 정도의 비교적 가까운 거리다. 그러나 우 중위는 허리가 불편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까 반강제로 뒷좌석으로 밀쳐질 때 등 받침이 비뚤하게 그의 등에 걸렸는데 장군님이 두려워 그 비뚤어진 등받이를 바르게 고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등에 지고 앉아 가고 있었다. 그런 자세가 오래가니 허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이런 속도 모르는 군의감은 훈시의 말씀을 주절대고 있었다.

"야, 나는 정말 불안해 죽겠어. 너희 같은 애들을 전방에 두고 있으니 말이야. 보병들이 맨날 나만 만나면 생지랄들을 하는 거야. 군의관들이 맨날 서울 갈 생각만 하고 군기도 지키지 않고 말이야. 머리는 항상 장발이지. 또 솔직히 니들이 뭐 아는 게 있냐? 그러면서도 보병들을 깔보고 다니니 누가 니들 좋아하겠어?"

충고인지 꾸지람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 소리는 서울까지 계속되었다.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수도통합병원에 도착하였다. 한참을 복도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이윽고 통합병원장이 약을 한 아름 주었다. 약 쓴 뒤 2주일 후에 다시 피를 뽑고 오줌을 받아서 오라고 하였다. 약을 받았으니 이제는 부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병원 문을 나서는 우 중위는 걱정이 태산이다. 갑자기 불려 오느라 돌아갈 차비도 없이 왔는데 돈 빌릴 곳도 없고 정말 난감하게 되었다. 병원 현관에 서서 하릴없이 사방을 한 번 둘러보고 있는데 지프 차 하나가 그의 앞에 멈추어 섰다. 그는 관심 없이 딴 곳을 보고 있었다.

 

“실장님!" 이건 나를 부르는 소리가 아닌가? 이게 무슨 환청인가? 그가 아무 반응을 하지 않자 그 지프 운전병이 차에서 내렸다. 이게 웬일인가. 군단 1호 차 운전병이다. 놀랍고 반가운 김에 우 중위는 외치듯 말했다.

"야! 정 병장 너는 여기 웬일이냐?”

"아이, 실장님도... 부관님이 뒤따라 가라고 해서 군의감님 차 뒤를 따라온 거예요. 그래야 실장님을 모시고 갈 수가 있잖아요?” 이건 지옥에서 부처님 만났다고 해야 하나 고마운 일이었다.

군대의 매력은 바로 이런 데 있었다. 빈틈없는 계획과 전우애, 이런 점이 우 중위가 군대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다이아몬드 두 개가 별 세 개 차를 타고 달리는 기분은 황홀하기만 했다. 같은 지프라도 쿠션이 다르다. 비록 성 판(별 판)은 가렸지만 지나는 군인들은 물론이고 검문소 헌병들도 소리 높여 경례를 붙인다. 구름 탄 손오공 기분이 이럴 것이다. 통일로 입구에 있는 군단 검문소에 오자 헌병들은 군단장 차에 의무실장이 앉아 있으니 매우 어리둥절하면서도 크게 구호 붙여 경례하였다. 세상의 이치는 이렇듯 양면성이 있는가 보다. 우 중위가 남한산성(육군 교도소) 갈까 봐 위협을 느끼고 있는 지옥 같은 군단사령부에서 이렇게 신이 나는 일도 함께 있다니 말이다. 그 후 그는 군 단장이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매일 군단장실에 가서 군단장의 양쪽 엉덩이에 근육주사를 각각 한 대씩 놓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