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意味가 되고 싶다.
『김춘수 시선』 이재복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08-30
아주 오래전, 미혼시절 이야기다. 남편은 진주에 난 서울에 살고 있었다. 친구로부터 소개를 받아 그에게 내가 먼저 편지를 띄웠다. 특별히 할 말도 없고 하여 첫 편지를 백지로 보냈다. 용기라기보다 사실 반은 장난이었다. 그러고는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런데 기분 나쁜 언급은커녕 의외의 답장이 왔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적혀있었던 거다. 일찍이 고향을 떠나온 내게 편지가 벗들과의 유일한 연락망이었다. 좋은 시나 글귀를 따서 인용하기를 즐겼다. 마치 그런 내 취향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시 한 수를 보내왔으니,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한 에피소드였다. 가족이 되려고 그랬는지 그 일이 우리 부부 인연의 시초가 됐다.
문학공부를 하며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가지치기다. 단숨에 멋진 시를 짓겠다고 덤빈 건 망상에 가까운 허욕이었던가 싶다. 일명 숙제시를 다급하게 주절주절 적어놓고 되읽어보면 언어잔치를 벌여놓은 듯이 자욱한 군더더기만 수북했다. 도무지 시가 써지지 않아서 고민하던 무렵에 들었던 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난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이 시가 단박에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초안은 대학노트 한 장 정도의 빽빽한 분량이었단다. 문장을 과감히 솎아냈기에 오늘날까지 널리 애송되는 ‘꽃’이 탄생한 셈이겠다. 글쓰기는 덧셈이 아니라 뺄셈이라는 말을 증명시켜주는 대목이다. 압축미의 진수를 새삼 생각해 본다.
시인은 한 편의 시를 통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담아낸다고 할 수 있다. 무의미한 사물도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마침내 고유한 존재성을 갖는 것이리라. ‘꽃’의 본질에 대해 단순히 장미나 국화 따위의 형이하학적인 물상으로 접근하면 싱겁다. 어떤 인식의 영역을 노래한다고 보는 것이 포인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서 그가 꽃이 되었듯이 나도 누군가의 호명을 받아 꽃이 되고 싶다는 갈망을 직접화법으로 주문한다. 이름 한 번 불리는 것, 중차대한 발표를 기다려본 사람이라면 능히 공감하지 않을까. 타인이 불러준 내 이름이 바로 그날의 영광스런 꽃이 아니겠는가. 살면서 한번쯤 꽃이 되고 싶은 건 우리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