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 봉원사에서 새로운 관계로 전환된 우태원과 이병주의 만남은 대학생과 고등학생에서 이제는 같은 대학생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태원의 인간됨 자체는 많은 사람들이 칭찬한다. 정의롭다, 약속을 꼭 지킨다, 성실하다. 그리고 독서를 많이 해 지식이 풍부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이런 소리는 언뜻 듣기에는 칭찬으로 들리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추구하는 것들은 대개가 이상적인 것들이어서 자신조차 지키기 힘들었고, 남들이 그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으면 노상 빈정대고 이죽대기 일쑤였다. 게다가 자신이 아는 걸 남이 모르면 ‘무식하다’ ‘멍청하다' 며 깔보고, 반대로 남이 아는 걸 자신이 모르면 ’그런 것들은 쓸데없는 헛소리'라고 매도한다. 이런 탓에 성격이 괴퍅하다, 까탈스럽다, 기이하다 등의 소리도 많이 들었다.
이런 그의 성격 탓에 이병주는 무척 힘이 들었다. 그는 양복이 있어도 한 번도 그걸 입고 나온 적이 없었다. 또 병주를 만나러 나오면서도 면도를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자신의 말로는 있는 그대로 자연스런 모습으로 만나야 된다고 하는데, 병주가 보기엔 그런 행동이 상대를 무시하고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으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길을 갈 때도 둘이 나란히 걷는 법이 없었다. 항상 제 맘대로 앞서 가다가는 뒤돌아보고 빨리 안 따라온다고 투덜대었다. 당시 명동의 '본전다방' 이나 청자다방'은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데이트 장소이건만 굳이 그런 곳은 노래가 저속하다, 퇴폐하다. 시끄럽다며 고상한 체 클래식 음악다방인 '설파다방' 이나 재즈 음악이 나오는 타임다방' 으로 가는 설익은 모습을 보였다. 그의 행동이 이처럼 거칠었지만 병주에 대한 사랑은 깊었다. 그리고 병주도 그 점만은 인정하고 느낄 수 있었다.
“'박정희가 정말 문제야. 왜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한다고 저 지랄인지 모르겠네?”
태원이 이런 말을 할 때는 그녀도 동의해주기를 바랐는데 병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방에 앉아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그런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런 비난은 박정희 대통령한테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비난의 범위는 넓어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교수, 선배, 친구 등에 두루 걸쳐 있어서 그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더구나 병주는 박 대통령이 내세우고 있는 ‘조국 재건’이나 ‘잘살기 운동’ 같은 생산적 구호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나라 경제가 우선 살아나야 민주화니 뭐니 하는 다음 일이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도 태원은 왜 그런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떨 때 병주는 '이 사람이 나를 정말 좋아하고 있는지‘ 의심이 갔고 이런 사람과 계속 만나야 하는가 깊은 회의에 빠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그의 사고와 행동이 싫기도 하고 의아했지만, 그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어떨 때는 뭔가 신선하고 힘이 솟는 느낌이 들 때가 있기도 하였다. 저 말들이 다 맞는 말이고 세상이 정말 다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아무튼 병주의 태원에 대한 감정은 이토록 복잡하였다.
군단 법무부의 주요 업무는 ’군법회의'(군사재판)를 여는 것이다. 군대 재판소인 군법회의는 미국식으로 구성된다. 즉 재판관들은 배심원제로 되어 있다. 주심은 전문직으로 사법고시를 거쳐 임관된 법무관이 맡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일반 장교 중에서 덕망이 있고 능력을 갖춘 사람이 촉탁되었다. 그리고 검찰관도 고시 출신이지만 변호인 역시 일반 장교 중에서 의뢰를 받게 된다. 어느 날 우 대위가 변호인으로 위촉되었다며 이번 달 재판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우 대위는 학생 때 경찰에 자주 불려 다닌 탓인지 재판이니 헌병이니 하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막강한 법무부의 지시이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생 처음 참가해보는 군사재판인 데다 임관 후 처음 입어 보는 정복이 영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막상 법정에 들어서니 총을 든 헌병들이 여기저기 서서 노려보고 있는데 변호인인 우 대위는 마치 자신이 재판을 받으러 온 피의자인 것처럼 무섭고 떨렸다. 재판 기록은 사전에 잘 읽어봐서 내용은 알겠는데 막상 변호하자니 할 말이 없었다. 우선은 긴장이 되어서 그렇기도 하였지만 범죄가 뚜렷한 것들이어서 변호인이 뭐라고 변명해주거나 법리적으로 따질 말이 없었던 것이다. 즉 병사가 탈영하여 구속되었는데 탈영은 군무이탈이라 하여 평시에는 3년 이하의 징역을 받고 전시에는 사형이다. 군인이 탈영했으면 벌을 받아야 하고 대충 3년으로 되어 있다면 3년을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무슨 변명이나 변호가 필요하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 뿐이었다. 시간이 가자 나중에는 요령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원래 재판관이나 변호인은 한 번만 하고 다음 재판에는 다른 장교로 바뀌게 되어 있지만 우 대위는 소질이 있다고 하여 상임 변호인을 하게 되었다.
병사가 탈영죄로 재판을 받을 때 우선 그의 학력을 물어본다. 만약 무학이면, “배운 것이 없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병사입니다. 이런 무지의 결과로 빚어진 과오에 대해서 다만 법의 테두리에서 치죄를 한다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라고 변호한다. 또 만약 대학 정도를 졸업하였다면, “우리 군에 많지 않은 이런 고학력을 가진 병사들의 일시적 과오를 용서하지 못하고 처벌 위주의 재판을 한다면 전과자만 늘어나게 되고 이것은 결국 국력의 낭비가 되고 맙니다. 이런 경우는 과오를 뉘우치고 다시 한번 군에 적응할 기회를 주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변호하였다.
사실 우 대위의 법률지식이란 대학 예과 때 ’법학통론‘밖에 배운 게 없으므로 이런 재판에서는 정말 일자무식의 문외한인 셈이었다. 재판 도중 꽤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다. 공병여단 하사 한 사람이 공사장에서 노인을 구타한 뒤 죽게 만든 사건인데 이 하사가 끝까지 절대로 자신은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도 강력하게 부인을 하니 재판부는 일단 그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재판을 연기하였다. 우 대위는 공병 하사를 따로 만나러 헌병대 영창을 방문하였다.
“이 하사, 솔직하게 이야기해봐. 보통 군법회의 변호인은 군단 법무부 사람들과 한통속이라고 생각해서 피고인들이 자기편인 변호인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오늘 내가 자네를 찾아온 것은 바로 그런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야. 이번 재판관들은 보병들이어서 만약에 자네가 거짓말한 게 드러나면 다음 재판에서 자네의 형량은 커지게 돼. 자네는 노인을 죽였어도 살인이 아니고 과실 치사에 지나지 않아.”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공병하사는 자신이 노인을 폭행하다 죽인 죄를 시인하였다. 이 하사는 다투다가 우연히 과실 치사를 한 것인데 자신이 살인을 했다고 법을 잘못 해석하였고 군에서 살인을 하면 사형당하는 줄 알고 무서워서 그 사실을 부인하였다는 것이다.
다음 재판이 속개되었다. 이 하사의 자백을 들은 재판관들은 불같이 화를 냈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면 그의 형량은 턱없이 높아질 것이 뻔하였다. 태원이 말하였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재판관님들, 그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판결로 응징하면 됩니다. 하사라고는 하지만 저 어린 병사에게 그런 위협적인 태도는 본 재판의 본질을 흐리는 행동입니다.”
재판관은 피고인의 차차 상급 계급이어야 하므로 이 하사의 재판관들은 소령과 중령들이었다. 일개 군의관인 대위가 이런 말을 하자 모두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지만 법무부 소속인 재판관과 검찰관은 표정이 밝아졌다.
"본 사병이 거짓 진술을 하여 재판까지 연기시킨 점은 크게 처벌되어야 할 파렴치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그 본질은 그 죄를 부인하여 득을 보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 피고인은 자신이 사람을 죽였으므로 스스로를 살인자라고 생각하였고 군법에 따라 살인자는 사형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피고인이 저지른 범죄는 술 취한 동네 노인이 자꾸 귀찮게 덤벼드니까 잠깐 밀친다는 게 결국 넘어지게 하여 뇌진탕으로 사망시킨 단순한 과실 치사입니다. 물론 사람을 사망케 한 행위는 크게 처벌받아 마땅하나 노인들은 스스로 미끄러지기만 하여도 사망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관대한 처벌을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변론은 이어졌다. 그제야 일부 재판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살인과 과실 치사라는 용어의 차이가 이렇게 복잡한 일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사령부의 수송부 병사가 실수로 버스에 불을 낸 사건이 있었다. 이 친구는 여름이 되어 사람 많은 내무반이 더우니까 버스 속에 혼자 자면 좀 시원할까 싶어 버스에 올라갔다가 휘발유가 담긴 깡통을 차고 그게 뭔가 하고 라이터를 켜다가 버스를 다 태워 버렸다. 역시 재판관으로 나온 보병 장교들이 고함을 질러대었다. 이 친구들은 그들이 재판관이란 사실을 까맣게 잊고는 흥분하여 마치 부대 지휘관이라도 된 양 길길이 날뛰었다.
"야, 이 병신아! 발로 깡통을 차면서 아무 냄새도 안 나더냐? 휘발유가 발에 묻지도 않더냐 말이다. 그런데 라이터를 켰다고? 너 똑바로 말해 일부러 방화한 거지? 그 이유가 뭐야?"
마구 윽박지르고 큰 소리로 욕을 해대니 그 사병은 무슨 소린지 몰라도 고개를 푹 꺾고 떨기만 했다. 그 사병이 아무말 못하자 그 무식한 중령은 자신의 추리가 맞다고 생각하고는 신이 나서 계속 동기를 대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 병장, 자네도 평소에 깡통이나 그릇을 차본 적이 있지?"
우 대위가 물으니 온 법정이 조용해졌다.
“네, 있습니다.”
그 사병은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했다.
“잘 생각해보고 대답해! 그때 말이야. 깡통을 차면 그게 자네 발등으로 넘어지나 아니면 반대편으로 넘어지나?"
그 사병은 우 대위의 의도를 제대로 눈치채지 못하고 즉흥적으로 대답했다.
“깡통은 반대편으로 넘어지죠.”
“그날 밤 말인데, 자네가 휘발유 깡통을 찼을 때 그 깡통이 자네 발등으로 넘어졌나? 아니면 반대편으로 넘어졌나?"
그제야 운전병은 눈치를 챘다.
“네, 휘발유가 제 발등에 쏟아졌다면 왜 불을 켰겠습니까? 깡통이 반대편으로 넘어지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뭔가 해서 불을 켰습니다.”
우 대위는 미국 영화에서 본 전문 변호사들의 흉내를 한 번 내어본 것이었다.
"이상입니다.”
이 문답을 듣고 있던 법무부 재판관과 검찰관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우 대위를 쳐다보았다. 마치 재판정이 아니라면 박수라도 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헌병대장과 친밀해지고 보안대장과도 안면을 익히고 나니 우 대위는 한결 기분이 안정되었다. 무엇보다 그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은 감찰부 소령의 격려였다. 가장 힘이 되는 요소는 사병들이 우 대위의 본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초 우 대위의 복무 목표가 바로 사병을 위한 군의관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법무부의 변호인 노릇까지 하게 되어 꽤나 기분이 든든했다. 하지만 그래도 많은 대령 참모들의 질책과 참모장의 괴롭힘은 아직도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고통은 경감되었다고는 할 수 있어도 없어졌다고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