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이 학교에 가니 게시판에는 내일부터 무기휴교를 한다는 방이 붙어 있었다. 강당에 내던져져 있던 책가방을 찾아 들고 교문을 나섰다. 신촌역 앞 버스정류장에 내려 하숙집으로 가는데 왼손에 따로 든 해부학 책이 자꾸 뒤로 빠졌다. 빠지려는 책을 자꾸 추스르는데 쉽지 않았다. 유치장에서 고생한 탓에 기운이 빠져서 그러는가 보다 하고 다시 책을 추스르는데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책은 잘도 챙기는군.”
뒤를 돌아보니 임상녕이었다. 서울농대를 다니고 있는 우태원의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다. 그는 며칠 전 태원의 학교가 데모를 하여 시청 앞까지 진출하였다가 해산당하고 주동 학생들이 경찰서에 체포되어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오늘 경찰서에 면회를 갔다 석방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태원의 하숙집으로 갔다. 그가 아직 오지 않아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야! 도대체 데모는 왜 하는 거냐? 일본과 국교가 수립되어야 돈이 생기고 그 돈을 종잣돈으로 해서 나라 살림살이를 늘려야 할 거 아니냐?"
하숙방에 앉자, 임상녕이 넌지시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지각 한 번 하지 않던 모범생이 아니었어?"
“왜? 모범생은 데모 못 하냐? 아니 모범생이니까 데모를 하는 거지.”
태원의 그 말이 임상녕에게는 태원 특유의 이죽거림이나 빈정거림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한번 말 해봐. 모범생과 데모는 어떤 관계인지.”
임이 평소 그답지 않게 감정 섞인 질문을 했다.
"그래, 대답하지. 박정희 말로는 우리는 돈도 없고 자원도 없으니까 외국 돈을 가져와서 공장 짓고 원료 사서 물건 만들어 수출해서 잘살자고 하지. 그래, 그 말도 일리는 있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4·19로 쟁취한 민중의 자유를 왜 박정희가 뒤집은 거야? 그리고 부국강병을 왜 저의 전유물처럼 써먹는 거냐 말이야. 모든 국민이 제 나라 잘살고 강한 군대 갖기를 원하지. 왜 그것이 저만의 철학인 양 선전해대는 거지? 차라리 나는 굶더라도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쯤에서 임도 할 말이 없지 않았지만 그가 유치장에서 방금 나온 데다 평소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남의 말을 듣지 않고 혼자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어대는 성격이라는 걸 잘 아는지라 참고 그냥 듣고 있었다. 태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해도 그렇지 남의 말을 들어가며 해야지 자신의 생각만 맞다고 하고 왜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는 귀를 막느냐 말이다. 생각이 다르면 잡아넣고, 고문하고, 죽이고. 민주주의를 부인하면서 자본주의를 하겠다고? 야! 그런 억지소리 하지 말고 총통제를 하겠다고 솔직하게 말하라고 해.”
임도 이 말에 일부 동의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일관성 있고 이치에 맞는 말만 하는 건 아니다. 특히 야당 쪽 인사들,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일평생 자신의 손으로 돈 한 푼 벌어본 적 없고 세금 한 번 내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다. 지금의 군사정부 군인들도 대개는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6.25 전쟁 때 목숨 바쳐 전장에서 싸울 때 이들은 대개 병역을 기피한 파렴치한들이다. 자신들의 그런 커다란 죄악은 숨겨두고 군인들의 무식함을 노골적으로 비웃고 또 자신들의 썩고 낡은 이데올로기와 주장은 정의라고 착각하고 빵보다 자유나 민주주의를 외치고 다닌다. 민중은 군인에 울고 정치인에 속고 사는 것이다. 임상녕은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박정희는 정의로운 사람이다. 뭔가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둘의 이야기는 평행선만 달리고 있었으므로 결국 둘은 바둑판을 당겨 돌을 놓기 시작하였다. 밤을 꼬박 새우고 임은 다시 수원으로 내려가고 우는 대구로 내려갔다.
"형, 그날 정말 놀랐어요. 고등학교 때 그렇게 친했고 나와 모든 생각이 똑같았던 임상녕이 나의 말을 왜 그렇게 못 알아듣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더라고요.”
우태원이 나에게 와서 그런 말을 했을 때 그의 의도가 순수하게 그 친구에 대한 비난만인지, 아니면 현실에 만족하고 의사 국가고시에만 매달리고 있는 나의 현실 도피적 행동에 대한 꾸중인지 모를 일이다. 그 무렵 또 이런 이야기도 한 적이 있다.
“김대중 쪽에서 저를 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하숙집에 같이 있는 부산 친구가 김홍일이하고 친하거든요. 그에게 제 이야기를 했던가 봐요.”
나는 한심한 생각이 들어서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왜 가보지 그랬어, 정의의 민주투사, 지금은 개인보다 나라가 병들었으니까 그 병 치료가 더 급하다며?"
슬쩍 그를 화나게 해보았다.
"하긴 그래요. 저도 가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저는 김대중의 노선은 싫어요.”
"그건 또 왜지?”
"난 우선 그 사람의 인간성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말하는 것을 언듯 듣고 보면 감동이 되고 위대한 지도자처럼 느껴져요. 하지만 자세히 따지고 보면 그는 자신의 이익, 패거리의 이익을 위한 사람으로만 느껴지고 또 그 이익을 위해 경상도와 전라도의 동서분열까지 획책하는, 본질적으로는 박정희와 같은 부류로 느껴져요. 게다가 그는 6.25때 이북을 위한 부역을 한 작자잖아요. 그래서 난 그를 찾아가지 않았어요. 제가 데모한다고 정치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야구 구경 가서 흥분하는 사람들이 다 야구선수가 되려는 사람들은 아니듯이... 훌륭한 정신분석가가 되는 게 나의 꿈이지요. 아니면 소설가.”
태원은 그런 학생이었다. 교수들은 가급적 그가 학교를 빨리 떠나주기를 바랐고 태원은 그런 등등의 이유로 빨리 입대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 그가 군에 가서 '군바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걱정 아닌 걱정도 좀 하였다. 하지만 그는 힘들다고 하면서도 잘 견뎌내고 있었다.
군단에 부군단장 황영시 소장이 새로 부임하였다. 베트남전에서 맹호사단장을 마치고 귀국하였다고 한다. 비록 그는 별을 두 개나 단 장군이지만 군대에서는 ’부자가 붙으면 다 별 볼 일 없는 자리‘다. 어디를 가기 위해 잠깐씩 머물 때 붙이는 수식어일 뿐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부군단장이라 환영식 행사도 없었으므로 어느 날 그가 감기 기운이 있다며 우 대위를 부른 것이 첫 대면이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형형한 눈매에 한눈에 보기에도 전형적인 멋진 장군 모습이었다. 감기 증상을 말한다며 시국에 관한 온갖 질문과 연설을 떠벌렸다.
"이봐, 군의관, 내가 귀국해서 보니 학생들이 매일 데모를 한다고 야단이더군, 도대체 뭣 때문에 데모를 하는 거야?”
마치 꾸중하듯이 물었다.
"당신도 얼마 전까지는 학생이었잖아?”
그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바라봤다.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내친 김에 모든 걸 터놓고 한 번 토론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로 공평하게 주고받는 대화는 불가능할 것아 그만 두었다.
"글쎄요, 저도 아는 게 없어 자세히 말씀드리긴 힘듭니다. 제 생각에 학생들 주장이 일본은 우리를 억압하고 착취하던 나라니까 그 나라가 진정한 반성을 하고 양쪽 국민들이 서로 화해하는 날까지는 국교를 터서도 안 되고 또 그런 나라의 돈은 받아서도 안 된다는 이야기 같던데요.“
태원이 무덤덤한 투로 이야기를 하자 그는 갑자기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새끼들 다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 거야. 제까짓 것들이 무얼 안다고 까부는 거야! 그리고 그거 다 김일성이가 시켜서 그런 거야. 내가 월남 가서 목숨 걸고 싸운 게 그런 치들을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니 후회가 막급하네.”
그는 무 자르듯이 명쾌하게 결론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피 흘려 월남 가서 번 돈과 ’대일 청구권‘ 자금 그리고 독일 광부와 간호부가 보내온 돈, 중동에서 오는 돈까지 합치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공업대국으로 갈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우리도 북괴는 물론 언젠가는 일본도 이길 수 있지. 마냥 옛날 감정만 갖고 일본놈들 아무리 욕해봤자 다 헛거야. 월남서 죽은 우리 애들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그런 날은 반드시 와야 해.”
우 대위는 큰 감명을 받기라도 한 듯 그의 연설에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며 공감의 표시를 해주었다.
이후 부군단장 황영시 소장은 자주 우 대위를 불렀다. 군의관 임무와는 관계없는 일들이었다. 어떤 때는 기차표를, 어떤 때는 비행기표를 육군본부에 반납하라고 심부름도 시키고 또 어떤 날은 신문을 펴 놓고는 이런 일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의견을 묻기도 하였다. 군단장에게는 중령 비서실장이 있고 수석 부관인 소령과 수행 부관인 대위가 있다. 하지만 부군단장은 그의 수행 부관 중위 외는 별다른 인원이 따로 없었다. 이러다 보니 우 대위가 점점 그의 부관 같은 일도 조금씩 하게 되었다. 이런 묘한 관계가 우 대위에게는 큰 짐으로 느껴지기도 하였지만 일생에 잠깐 머무는 군에서 이런 보병 장군의 신임을 받는 것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황영시 소장이 나중에 우리나라의 크나큰 사회변동의 주역이 되리라는 사실은 본인을 포함해서 아무도 아는 미리 아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