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부인의 자태를 닮은 청노루귀!
꽃잎의 색깔이 짙은 청색을 띄고 있어서 ‘청노루귀’라 부르는 것이다. 질병이 덮친 도로는 주일답지 않게 한산하여 거침이 없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심의 풍경이 한 장의 흑백사진이다. 토요일(3월 7일)밤부터 새벽까지 촉촉하게 내린 봄비가 대지위로 흩뿌리는 아침햇살아래 수은주가 치솟자 회색빛으로 꿈틀거리는 것이다.
사진은 빛이 생명인데, 일기정보와는 달리 그 빛이 차단된 일요일의 아침나절이다. 안심을 지나고 하양을 지나 영천을 벗어나도 끊임이 없다. 시야를 칙칙하게 가리는 지독한 안개다. 흡사 런던 시내를 가로질러 끊임없이 안개를 토해내는 테임즈강을 따라 가는 느낌이다. “머피의 법칙이 따로 없네!”누군가 창밖을 보고 한숨을 짓는 중에도 차는 포항을 향해 엔진에 열을 가한다. ‘코로나19’를 피하기 위해서는 집이 최고라지만 이 봄을 그렇게 무산시키기에는 꿈틀거리는 욕망이 가만두질 않는다. 결국 마스크로 앞면을 촘촘하게 가리고 손 소독제를 손바닥에다 칙칙 뿌려 듬뿍 바르고는 고고한 자태의 청노루귀를 만나고자 길을 나선 것이다.
청노루귀 또한 이름 그대로 노루귀의 일종이다. 단지 꽃잎의 색깔이 짙은 청색을 띄고 있어서 ‘청노루귀’라 부르는 것이다. 흰색이나 분홍색 노루귀보다 개체수가 현저하게 적다보니 조금 더 귀한 대접을 받을 뿐이다. 노루귀란 이름도 봄을 맞아 톡톡 터트린 꽃잎이 노루귀를 닮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러해살이풀로 3~4월에 걸쳐 피며 꽃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미나리아재빗과의 식물로 세 갈래로 갈라진다. 줄기 끝에서 한 송이씩 피고 수과(瘦果)를 맺는다. 어린잎은 식용하고 뿌리를 포함한 전체를 약용한다. 우리나라 각 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흰색과 분홍색의 노루귀는 야생에서 흔한 반면 청색 노루귀는 깊은 산속의 산기슭에서 주로 발견된다.
노루귀의 주 매력은 아무래도 줄기를 빽빽하게 덮은 희색의 잔털이다. 흰색, 분홍색, 청색이 선명한 10장 내외의 노루귀를 닮은 꽃잎도 봄을 유혹하기에 충분하지만 햇볕이 스민 솜털은 가히 일품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솜털이 보송보송한 노루귀가 더 귀한대접을 받는다.
우려와는 달리 안강휴게소를 지나자 햇볕이 쨍쨍하다. 질병이 덮친 도로는 주일답지 않게 한산하여 거침이 없다. 어렵잖게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날씨는 급변하여 하늘을 뒤덮은 구름이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안 그래도 깊은 산중이라 가뜩이나 좁아 보이는 하늘 가득 먹구름이 뒤덮다 보니 손오공이 요괴의 감언이설에 속아 태산을 진 듯 어깨가 무겁다. 오늘도 틀렸구나! 한숨을 쉬는 중에 물 마른 논바닥에서 입만 뻐끔뻐끔 갈증을 해소하려는 붕어의 등짝으로 찔끔찔끔 내리는 가랑비처럼 언뜻언뜻 햇살이 비친다.
그나마 다행이다 싶어 햇빛과의 술래잡기로 숨통이 트일 만큼의 갈증을 해소하고 산을 내려온다. 태양은 이제 중천, 돌아오는 길이 너무 일찍 다 싶어서 대구인근의 모 마을을 찾았다. 대구에서 이름만 대면 대부분이 알만한 동네다. 하지만 ‘코로나19’란 몹쓸 병마는 이곳까지 뿌리를 내리려 안달복달인 모양이다. 마을 입구를 지켜선 할아버지는 일행을 향해“우리도 좀 삽시다.”며 돌아가기를 종용한다. 사실 산으로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마을로 스며들면 되겠지만 그것은 위험천만한 생각이다. 순순히 오던 길로 돌아선다.
요행히 마을에 들어갔다고 친다면 이방인의 때 아닌 출몰에 마을사람들은 동요할 것이고 제대로 임무를 수행치 못한 할아버지는 마을사람들의 지청구를 핀잔처럼 들어야 할 것이다. 사실 그것까지는 대수롭지 않다 치더라도 마을에 ‘코로나19’라도 돌면 그 책임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때는 일기정보가 정 맞아 변덕스러운 날씨를 잠재운 하늘에서는 태양이 쨍쨍하다 못해 눈이 부시다. 날씨만큼 화창한 봄날이었으면 좋으련만 어디를 가나 질병과의 사투로 연일 힘겨운 봄이다.
아~ 정말 봄 같은 봄은 언제쯤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산기슭을 따라서 고고한 자태의 청노루귀가 청색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봄나들이를 나선 새색시들 모양 무리를 지어 화사하게 피는데 말이다. 그 화창한 봄 풍경을 뒤로하고 ‘코로나19’의 등쌀에 칩거에 드는 봄날이 마냥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