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렬의 ‘왕대밭에 왕대 나고’

2020-06-10     김채영 기자

 

조병렬의 ‘왕대밭에 왕대 나고’

 

담양 대나무골 테마공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넓은 산자락을 따라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선 가운데, 일만여 평의 대숲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산마루에는 구름과 안개가 뒤섞여 노닐고, 이따금 햇살이 대나무 이파리에 반사되어 지나는 길손을 유혹한다. 대나무 숲은 어느 뜻있는 분의 30여 년에 걸친 노력으로 조성되었다고 하니, 그분의 깊은 뜻을 헤아릴 길 없으나 숱한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 마력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울창한 대나무 숲길 사이로 조성된 죽림욕 산책로, 왕죽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대나무에서 청량한 대숲 바람이 인다. 산책로에 들어서면 댓잎향이 촉촉이 젖은 흙냄새와 어우러져 온몸에 맑고 시원하게 스며든다.

예로부터 선승이 수도하는 도량 주변에는 대숲이 많았다. 겨울철의 외풍을 막을 수 있고 대나무의 맑은 정신도 본받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대숲이 사랑받는 이유는 바람소리 때문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사악사악' 댓잎이 부딪치는 소리에 조용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그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어 온갖 망상과 번뇌를 잊을 수 있다고 하니, 대숲이야말로 오욕칠정의 인간과 이웃해야 할 소중한 마음의 벗이 아닐는지.

울창한 대숲에 압도당하면서도 그 고결한 분위기에 동화되려고 천천히 비탈길을 오른다. 산 중턱에는 잘 가꾸어진 넓은 잔디 광장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아담한 찻집이 있고, 오른쪽에는 대나무를 잘라 만든 평상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나는 평상에 올라 마치 좌선하는 도인처럼 가부좌하고 허리를 곧게 편 채 명상에 잠긴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물소리,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대나무 잎이 부딪치는 소리도 없다. 어느덧 무념무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누더기 걸치고 죽장망혜에 죽립을 눌러쓰고 한적한 산길을 거니는 도인 같은 풍모의 나를 상상해 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현실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다시 대숲으로 눈길을 돌린다.

굵게 자란 왕대밭이 눈앞에 가득하다. 새로 돋는 죽순마저도 왕대로 태어나는 곳, 그래서 왕대밭에 왕대 나고 졸대밭에 졸대 난다고 했던가. 부피 자람은 하지 않고 길이 자람만 하는 대나무의 속성. 일행 중 누군가 대나무는 봉건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와 다를 바 없다며 만인 평등에 어긋나는 비민주적인 나무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말은 잘못된 말인가? 그러나 겉보기에는 초라한 졸대의 모습을 상상하며, 선비는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는 꼬장꼬장한 자존심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옛날 베잠방이 선비들을 떠올려 본다.

대나무는 순수 혈통을 중시하는 고귀한 정신을 가졌다. 다른 나무들처럼 무더기로 꽃을 피우고 씨받이를 하여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 뿌리로만 번식하고 자신의 형편에 맞게 수를 늘린다. 땅 기운이 충분하지 않으면 죽순이 태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만약 지나치게 많이 번식하여 지력이 다하면 그 대밭의 대나무들은 모두 죽어 버린다. 이처럼 평생 꽃을 피울 줄 모르고 살던 대나무는 생의 종말에 가서야 오직 한 번 꽃을 피우고 말라 죽는다. 결실의 기약도 없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꽃을 피우는 대나무의 삶은 비장감마저 든다.

대나무는 왜 속이 텅 비어 있을까? 나는 그 빈속을 좋아한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 주려면 내 마음은 비어 있어야 한다. 내 마음이 욕망으로 가득 차고서는 다른 사람의 진실한 마음도 사랑도 담을 자리가 없다. 오늘날 사회에서 속 빈 사람이라고 하면 모욕적일 수 있지만, 나는 더러 속 빈 사람이 되고 싶다. 대나무의 빈속과 곧고 단단한 줄기는 가진 것 없지만 굽힘이 없고 남을 원망하지 않는 선비적 표상이다. 또한 그 빈속은 무한한 포용력을 갖춘 여유의 공간이지만, 함부로 불의와 부정이 범접하지 못하는 기개와 절조의 고결한 공간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대나무를 군자의 나무로 칭송하지 않았던가.

굵고 싱싱하게 하늘로 치솟고 있는 혈기왕성한 왕대밭 죽순의 모습이 선명하게 내 눈에 들어온다. 껍질을 뒤집어쓰고 나온 죽순은 자라면서 허물을 벗기 시작한다.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껍질 하나가 땅으로 툭 떨어진다. 허물 한 겹 벗어 던지니 매끈하고 잘생긴 줄기가 나타난다. 대나무나 사람이나 허물을 벗어야 본질이 드러나고 새로운 모습으로 발돋움하는 모양이다.

저 죽순은 한 겹씩 껍질을 벗어던지면서 제 본래의 모습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고, 마디마디를 길게 늘이면서 여유롭게 속을 비워가고 있는데, 내 삶은 너무나 많은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닐까? 모태의 첫 나이테에 비례하여 자꾸 늘어만 가는 부끄러운 나의 껍질들. 저 죽순은 벌써 허물을 다 벗어 가는데....

나는 그만 조용히 눈을 감는다.

 

수필집 “그래도 이 세상이 낫다” 수필과비평사. 2019년 1월 25일

 

섬세한 묘사력 덕분에 현장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행간으로 은은히 밴 죽순 향을 맡으며 탈피脫皮란 단어를 떠올려본다. 동물군인 파충류나 곤충류 등이 성장함에 따라서 낡은 허물을 벗듯이 식물군에 속하는 죽순도 한 그루의 나무가 되기 위해 몇 겹의 옷을 벗는다. 더 흥미로운 건 왕대나 졸대가 애초부터 신분이 다르다는 점이다. 대나무의 세계에서 피라미드식 신분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부피 자람은 하지 않고 길이 자람만 하는 대나무의 속성'을 간과하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획득되는 정보, 바로 이런 것이 문학적 순기능이 아닌가 싶다. 대나무처럼 나를 감싼 두꺼운 허욕을 벗고 거듭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