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현의 ‘경계에서’

2020-09-02     김채영 기자
픽사베이

 

조지현의 ‘경계에서’

 

내과계중환자실(MICU) 아침 회진, 신경과 교수님을 따라 정신없이 좁은 병상 사이를 이리저리 다닌다. 지금은 이곳에 누워있는 수많은 환자들도 한때는 건강한 활력 징후를 보이며 굳건히 걸어 다니고, 또 자신들만의 삶의 영역을 넓히고자 애쓰며 살아왔을 것이다. 어쩌면 치기 어린 젊은 날, 큰 포부를 꿈꾸며 밤거리들을 쏘다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바다 앞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환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나간 날들을 회상하고 있을까. 지금 내 눈앞에는 수많은 관(tube)에 연결되어 겨우 호흡과 맥박을 유지하고 있는 환자가 잠들어있다. 인공호흡기 튜브에 의지해 잠든 노인의 찡그린 얼굴 위로, 탯줄에 연결되어 잠든 태아의 모습이 스친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종이 한 장 차이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사람이 죽거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차, 생각의 소용돌이에 너무 깊이 빠지지 않으려 다시금 교수님의 목소리에 집중해본다. 교수님은 또 다른 환자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고 계셨다. 신경학적 검사도 직접 시연하신다. 그러나 나는 이내 잡념에 사로잡히고 만다. 내 머릿속에서는 온통 한번 건너가면 돌아올 수 없을 죽음의 바다, 그 깊고 검은 물이 찰박찰박 파도치고 있다. 그 환자는 파도 앞에 서 있다가 점점 바다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갈 것 만 같다. 환자의 얕은 숨결 그 위로 깊은 물결들이 잠잠히 몰려와 그를 금방 덮어버릴 것만 같다.

철저하게 목격자로서 병원에서 지낸 시간은 나에게 다양한 생각을 할 순간들을 마주하게 했다. ‘학생 의사’라는 신분은 우리에게 독특한 정체성을 부여한다. 흰 가운을 입고 있지만 당연히 의사가 아니며, 실습생들은 어떠한 자발적인 의료 행위에도 참여할 수 없다. 그저 긴긴 시간, 선배 의사선생님들을 관찰하며 그들이 하는 의료 행위를 눈으로 보고 배울 뿐이다. 그러나 아무런 행위도 할 수 없는 실습생들에게, 역설적이게도 병원 내 모든 구역의 출입 권한이 주어진다.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은 없다. 병실은 물론, 중환자실과 수술실을 직접 드나들고 환자의 수술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환자가 입원해서 퇴원하기까지 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이 관찰의 시간은 오직 의학도에게 주어지는 기회이자, 의료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기도 하다. 마치 의료인과 일반인사이의 경계선에 서있는 것처럼.

환자들은 매일 병원 문을 열고 쏟아져 들어온다. 인간은 왜 운명처럼 주어진 생의 한계를 부정하고 삶을 연장시키려 할까.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이 두려워서 일까, 아니면 아직 살아보지 못한 날들에 대한 기대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까지 움켜쥐고 산 날들에 대한 집착일까?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일까. 머릿속에 끝없는 질문이 이어진다. “생명”이라는 단어를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본다. ‘명’이라는 단어의 ‘이응’ 받침이 내뱉는 숨 끝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단어의 진동이 호기 끝자락에 와서야 사라진다. 이 진동 소리가 미약하게나마 이어지다가 이내 내뱉는 숨 끝에서 사라지는 것이 꼭 덧없이 끝나버리는 인간의 삶과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질병은 운명이 아닌 삶의 현상일 뿐이며 질병이 삶의 한계를 정해서는 안된다고. 누군가 개입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조금 더 연장해줄 수 있다면, 그래서 생명이 영위되고 우리 스스로 그 날들에 값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오롯이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하고.

내 서투른 병원 실습 생활을 돌이켜 본다. 삶과 죽음의 경계, 의사와 학생의 경계, 또 수술방 안과 밖의 경계. 경계에 서서 바라본 병원의 모습은, 아니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내는 모습은 매일, 잠잠히, 치열했다. 어떤 이는 죽고자 했고 어떤 이는 살고자 했다. 모든 것이 원칙적으로 흘러가는 동시에 아무것도 원칙적이지 않은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질병과 싸우면서도 분명히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의 경계가 너무 희미해 보일 때도 있었다.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내 죽음의 순간을 자주 생각해보았다. 삶의 마지막 순간 호흡이 다하기 전, 나는 내 삶의 사명을 다 했노라고 이야기하며 죽을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어 보는 세계로 들어가고 싶다. 실재하는 것 그 이면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보고 싶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사람들을 삶의 방향으로 더 굳건히 끌어당겨오고 싶다. 빛과 어둠의 경계가 있다면 빛의 방향으로 조금만 더.

 

제9회 한국의학도 수필공모전 대상 수상작

 

전공의들이 의대정원 확대정책 등에 반발하여 집단휴진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벌써 며칠 째인가. 정부정책과 의료파업 그 중간에 끼인 국민은 불안하다. 죄 없는 환자들은 이중고를 겪기 마련이고 우리는 한쪽 메시지만으로 판단하기가 예민한 문제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의 돌발 출몰로 전 세계가 대혼란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와중에 하필이면 이런 일까지. 무더운 여름, 방호복을 입고 땀 흘리는 의료진들의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면서 인류애를 느끼기 충분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생명을 다루는 의료인들이야말로 귀한 직업이라 말해도 무방하지 싶다.

조지현의 ‘경계’를 읽는다. 시간 흐름에 따른 순차적 구성법으로써 스토리가 자못 경건한 어조를 띤다. 병원이 공간적 배경이라 그럴 수 있다. 치료 행위자가 아닌 목격자로서의 관찰자적 서술형식이다. 삶과 죽음이란 절체절명의 경계에서 고통과 신음과 절규의 본질을 지켜보는 예비의사는 젊은 학생이다. 사유의 어른스러움이라 할까. 학과의 특성이라 할까. 또래에 비해 정서적 조숙함이 오히려 안쓰럽다. 경각에 달린 목숨이 자신의 손놀림 향방에 따라 살고 죽는다 생각하면 그 부담감은 또 얼마의 무게겠는가. 우리가 선 경계에서 ‘빛의 방향으로 조금만 더’ 힘을 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