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태의 ‘싱어’

2020-09-16     김채영 기자

 

김예태의 ‘싱어’

 

우리는 물의 여러 가지 덕성 중 자정능력을 빼놓지 않는다. 흘러흘러 가면서 온갖 공해로 오염된 자신을 스스로 정화시켜 가는 물, 사람도 70%가 물로 되어 있다고 하니 물이 가진 능력의 70% 정도는 자정自淨이 가능하지 않을까?

카슨 매컬러스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은 너무 좋아서 내가 다시 읽지 못하는 책이다. 40년 가까이 지났는데 다시 읽을까 하다가 그 느낌이 달라질까봐 그만둔 책이다. 어쩌면 내 안에 들어와 이미 많이 변색되고 변질된 책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인 존 싱어, 다섯 명의 인물 중 가장 처절하게 고독한 사람.

싱어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알아듣지 못한다는 말조차 하지 못한다. 그는 사람들이 왜 분노하고 슬퍼하는지, 그러다가 왜 기뻐하게 되는지 모르면서,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어야 했다. 그저 말하는 사람의 눈빛을 따라 함께 분노하고 함께 서러워하며 함께 꿈꾸어 줄 뿐이다. 이웃들이 기뻐하며 희망에 넘쳐 돌아가면 싱어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그들의 분노와 눈물과 기쁨과 희망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고독에 대해서, 어느 날 그 친구가 죽고 난 뒤 싱어는 친구가 기다린 것은 자신의 고독한 사연의 편지가 아니라 편지에 동봉하는 1달러의 지폐였음을 알게 된다. 싱어의 자살은 이웃들에게 충격이었고 그들은 싱어의 죽음을 애도하며 추앙한다.

친구에게 끌려 상계동 어느 교회에 간 적이 있다. 이곳저곳 둘러보며 교회의 의전 순서를 하나하나 짚어보다가 “다 같이 통성기도를 바칩시다” 하는 순간 세상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위, 아래층을 꽉 메운 교인들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천둥 치고 벼락 치는 소리였다. 양철지붕에 우박 떨어지는 소리였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저마다 울부짖고 비명 지르고 떠들고 게다가 방언까지 섞여 있어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저 간간히 들리는 것은 주여! 아버지! 그리고 감탄사가 전부였다. 그러는 사이 쪽빛 제복을 입은 전도사들이 신자들의 자리를 돌며 정수리에 손을 얹고 주기도문을 외어주었다. 악을 쓰던 사람의 소리가 꼬질러바치는 말로, 꼬지르던 말이 데시벨 낮은 자성의 목소리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입술만 달싹이는 기도로 바뀌어 갔었다. 기적이다. 고작 40여 분이 흘렀을 뿐인데 성전 안은 물이 잦아들 듯 소리가 잦아들고 집도하는 목사 한 사람만의 기도가 성전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문득 불타는 토막을 보며 복바위를 끓어 안고 몸부림치는 술이 엄니가 떠오른다. 복바위나 오색 천이 날리는 성황당 느티나무 앞에서 외는 주문이 통성기도와 정말 다를까? 어떻게 다를까? 그리고 싱어가 떠올랐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싱어를 향해 물 흐르듯 흘러가는 자신의 내면을 토로하는 사람들, 말하는 이의 표정을 시늉지어 보이기만 했는데 상담자가 되고 구원자가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웅이 되어버린 싱어, 목사나 신부처럼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지만 정작 자신은 정신병자인 친구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흔들리는 영혼의 싱어.

죽도록 미운 사람이 있어 믿을 만한 친구에게 얘기했더니 친구가 충고한다.

“예수님은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들까지 용서하셨어, 그분이 너의 구원을 위해 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에이 엿 먹어라,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억울함과 울분과 증오에서 오는 고통을 함께 나누어가질, 이 엄청난 고통을 유리를 깨 바수듯 함께 바수어 줄 친구가 필요한 것이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성경, 불경, 천부경, 코란은 말할 것도 없이 유치원에서도 읽어주는 동화의 주제가 아니란 말이다. 이 바보 똘마니 같은 놈아.’

고여 있는 물은 썩게 마련이다. 고여 있는 감정도 썩을 수밖에 없다. 썩은 감정들은 썩어 썩은 생각들을 불러오고 썩은 생각은 악취가 심해 자신을 골방 속에 가두고 자책과 염세에 빠져들게 한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나누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선과 악으로 양분된 세상에서 자칫 말을 잘못했다가는 악의 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이 말을 낳으면서 그 말이 손가락처럼 늘어나 부메랑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롭다. 만약에 말이 말을 낳지 않으면서 결코 손가락이 되어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진정한 상담실이요 구원의 성지라고 믿는다. 싱어는 처음엔 상담실이었고 나중에는 교회였다. 싱어는 보잘것없는 상담자로 시작해서 떠받들고 싶은 신부가 되고 하느님이 된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자정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지적하고 훈계하고 가르치기보다는 먼저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이나 감정들이 밖으로 흘러나오면 그 속에 들어 있던 순도 높은 그리움, 아픔, 미련, 걱정, 미움들도 비누처럼 풀어져 함께 흘러갈 것이다.

성당의 반모임에서였다. 반장이 순서를 주도했고 한 교인이 자유토론 시간에 자신의 삶을 반추하기 시작했다. 20여분쯤 지나 얘기가 무르익자 여인의 얼굴에 홍조가 감돌았다. 그때였다.

“자매님, 그 얘기 다 들으려면 석 달 열흘 하고도 반나절이 더 필요할 테니 그만둡시다.”

깔깔 웃는 반장의 재치(?)와 말을 놓친 여인의 당혹감, 그리고 미처 풀리지 못한 여인의 아픔이 뒤엉키며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왔다. 달그락거리며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이때도 싱어가 나를 찾아왔다.

“엄마, 남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그냥 듣기만 하면 되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할 텐데, 하는 일을 버릴 수 있니?”

어머니께서 반문하셨다.

소망일 뿐 아직까지 길을 내기 위한 첫 삽을 뜨지 못하고 있다.

 

산문 ‘문을 연 아가씨와 문을 닫은 아저씨’ 도서출판 파루. 2012. 10. 23.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데 성공하는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중요한 것들은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을 계속 시도하는 사람들로부터 이루어졌다.” 데일 카네기의 명언이다. 두꺼운 책을 읽는 일이 내겐 그러했다. 국어의 기본이 되는 말하기‧듣기‧읽기‧쓰기 가운데서 나는 읽기가 영 재미없었다. 어린 시절, 책이 귀한 탓에 읽는 습관이 길러지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일지 모른다. 반면 듣기에 흥미를 가진 것은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이야기 덕분이고 쓰기는 멀리 시집 간 고모들한테 보내는 할머니의 편지를 받아 적다보니 익숙해진 것이리라. 늙어도 늙지 않으려면 문학을 읽어야한다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말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명색이 문학판 언저리를 맴도는 자가 읽기를 등한시 한다는 건 역설이다.

물의 자정능력, 난 주로 맥주를 물처럼 마신 다음 날 깨닫는다. 물이 없다면 무엇으로 위장을 세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작가는 독서로써 영혼을 정화시키는 것 같다. ‘싱어’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은 곧바로 해결된다. 궁금증을 오래 끌지 말라는 배려인 듯 도입에서 밝혀준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이란 소설 속 인물이다. ‘너무 좋아서 내가 다시 읽지 못하는 책’이란 언급이 신선하다. 마치 첫사랑은 절대 다시 보지 말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듯이 읽힌다. 첫 느낌을 잃고 싶지 않은 그 기분이 헤아려진다. ‘에이 엿 먹어라/바보 똘마니 같은 놈’ 무거움을 덜어내서 좋다. ‘지적하고 훈계하고 가르치기보다는 먼저 들어주어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에 동의한다. 바야흐로 등화가친의 계절이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일단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