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1월'은 야누스의 얼굴이다
한 해 가운데, 멋없고 싱거운 달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달이 자신의 색깔과 향기로 무장한 재간둥이요 멋쟁이들이 아니던가. 그래도 자존감과 존재감이 떨어지는 달을 꼽으라면 1월이다.
누가 뭐래도 ‘1월(January)’은 야누스의 얼굴과 닮았다. 한 해 가운데, 멋없고 싱거운 달(月)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달이 자신의 색깔과 향기로 무장한 재간둥이요 멋쟁이들이다. 그래도 자존감과 존재감이 떨어지는 달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1월이다. 1월에겐 염치없지만, 12월이 가진 잔상의 그림자가 1월에 깊게 드리워져 설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12월 달력엔 스케줄로 꽉 차서 허접한 날이 하루도 없었지만, 1월은 온통 텅 비었다. 그런들 어찌 하겠는가. 1월은 12월을 향해 애잔한 손길을 내밀지만 12월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어찌하면 좋을꼬. 그렇다고 지나간 모든 달이, 회한이 되고 미련으로 남는 건 물론 아니다. 계절의 여왕 5월이, 지나간 4월에 어떤 미련을 갖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내 의식세계가 나를 알아차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12월의 하루하루는 초조함과 긴장감이 겹쳐져 아쉬움이 고이는 달이었다. 꽉 찬 회한들로 하루하루를 허기 속에 허우적대지만 내색하지 않고 내색 할 수 없는 달이 바로 12월이었다. 아쉬움은 모자람의 또 다른 이름 이기는 하나, 채움을 향한 또 다른 심쿵이 아니겠는가.
1월의 시계 초침은 왜 그리 꼼짝하지 않고 미적대는지, 제대를 앞둔 병장의 모습과 흡사하다. 포만과 만용이 도처에 널브러져있다. 그러니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지나간 12월에 곁눈질하며 눈길이 맞닿기를 바라는지 모른다. 몸은 1월에 마음은 12월에 놓여있으니 야누스와 꼭 닮았다. 한 몸에 두 얼굴을 한 야누스 말이다. 결혼한 사람이 부인을 옆에 두고 첫사랑에 목매이는 꼴이다.
‘1월’을 뜻하는 January는 로마신화의 신 ‘야누스(Janus)’에 어원을 두고 있다. 야누스는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로 알려져 있듯, 신화에서 신전 출입문을 지키는 ‘문지기’라니 제격이다. 몸통 하나에 두 얼굴을 가졌으니 충직스런 문지기의 표상이 될 듯도 하다. 물샐틈없는 경계가 가능했으리라. 그래서 몸은 하나지만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의 표상이 된지 오래다. 본래는 1월이 '수호신'이라는 긍정적인 뜻을 가졌지만, 세월을 지나오면서 두 얼굴을 가진 겉과 속이 다른 사람으로 묘사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그냥 '이중적 인격자'로 낙인 찍혀버렸으니 야누스가 살아 돌아온다면 억울하여 화날 만도 하다.
솔제니친(1918-2008)이 생각난다. 그는 소련의 작가였고,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되었으나 공산주의 체재에 비판적이란 이유로, 그는 소련 당국의 불허로 스웨덴 노벨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 후 솔제니친은 결국 반역죄로 체포돼 강제로 국외 추방당했다. 1974년 망명길에 올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그는 들릴 듯 말 듯 “작가는 조국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라는 감회를 토로했다. 그 후 그는 스위스로 갔다가 미국 버몬트의 한적한 시골마을에 정착했다. 조국과 모국어가 없는 미국, 그 토록 바랐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들 그에게 미국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솔제니친에게 미국은 '1월'과 판박이다. 미국 체류 20여 년 동안 몸은 미국에, 마음은 소련에 머물었으니 야누스와 무엇이 다르랴.
이미륵(1899-1950)의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소설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언젠가 우체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알지 못하는 집 앞에 섰다. 그 집 정원에는 한 포기 꽈리가 눈에 띄었고, 그 열매는 햇빛에 빛났다. 우리 집 뒷마당에서 많이 봐왔고, 어릴 적에 즐겨 갖고 놀았던 이 식물을 그땐 얼마나 좋아하였던가.“ 이미륵은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과대학 전신) 재학 중에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의 검거를 피해 상하이를 거쳐 독일로 망명했다. 독립된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타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독일인들은 막스 뮐러의 소설 ‘독일인의 사랑’ 만큼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소설책을 아꼈다. 독일 국어교재에 실리기도했다. 이미륵의 발은 독일에 디디고 서있지만, 의식세계는 조국 대한민국을 향해있었으니 독일은 속이 텅 빈 쭉정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소설 구석구석에 향수가 짙게 배어있다. 야누스의 두 얼굴이 저 먼 이국에까지 스며들었다고 생각하니 향수와 설움이 인다. 이미륵의 독일에서의 삶이 1월이었다면, 조국을 그리워하는 그의 영혼은 12월이었으리라.
나 또한 고향 떠난 지 벌써 몇 년이던가. 이 몸은 이곳 회색 도심에 비비적대며 살고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수구초심 고향 냇가에 발을 담구고 있으니, 1월과 무엇이 다르랴. 누가 뭐래도 1월은 야누스의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