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①물못자리에서, 보온절충 못자리로

1971년까지 물못자리에서 72년부터 보온절충 못자리로

2021-03-31     유병길 기자
모내기하려고

 

경북 상주지역에서는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배 고픔의 고통을 참으며 4월 중하순에 물못자리를 하였다.  72년도에 기적의 통일벼를 처음 재배하면서 보온절충 못자리에서 모를 키우기 시작하였다. 3월이 되면 농사철이 시작되었다. 무논에 퇴비를 소 등에 길마 망가를 얹어 양쪽에 퇴비를 실어 날라 논에 고루 뿌리고 쟁기로 논을 갈았었다. 물못자리는 볍씨를 큰 그릇에 넣고 물을 부어 휘휘 저어 위에 뜨는 벼는 건져 내고 종자소독을 하였다. 이튿날 새 물로 갈고 일주일 정도 물에 담가 놓으며 매일 새 물로 갈아 주었다.

논둑을 바르고 물을 가두어 둔 논에 못자리를 만들 만큼의 면적에 작은 둑을 만들었다. 퇴비를 넣었으나 거름기를 보충하려고 새순 돋아난 포플러(미루나무) 가지를 베어 작두로 잘게 썰어 넣고 써레질하였다. 1.2m 넓이의 묘판 네 귀에 말뚝을 박고 새끼 줄을 쳤다. 이삼일 후에 흙물이 가라앉으면 일주일 정도 담근 벼를 건져 물기를 빼고 묘판에 고루 뿌려 물못자리를 만들었다. 물속에서 벼는 산소가 부족하여 숨을 쉬려고 새싹을 먼저 내는 지혜가 있었다. 그냥 두면 뿌리가 없어 바람이 불면 한 곳으로 몰렸다. 낮에는 물을 빼 묘가 뿌리를 내려 땅에 박도록 눈 겨누기를 하고 밤에는 물을 대어 보온을 하였다.

모와 같이 자라나는 피와 잡초는 일일이 손으로 뽑았다. 피를 조금만 뽑다 보면 양쪽 다리에 까맣게 거머리가 붙어 피를 빨아 먹었다. 거머리는 잘 죽지 않아 뒤집어 놓으면 죽는다 말이 있었다. 장난기가 있는 아이들은 나무막대로 뒤집기도 하였다. 도시에서 여성들의 헌 스타킹을 모아 농촌에 보내주었다. 스타킹을 신으면 거머리가 달라들지 못 하였다.

대부분 천수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로 농사를 지었다. 못자리할 시기에 비가 오지 않으면 농업인들은 애가 탔다. 기다려도 비가 오지 않으면 할 수 없어 밭못자리(건 못자리)를 만들었다. 소로 논을 갈고 써레질하고 넓이 1.2m 망을 만들었다. 물에 담그지 않은 마른 볍씨를 뿌리고 흙을 덮었다. 벼의 생명력이란 대단하였다. 며칠 지나서 묘판을 파보면 산소는 충분하고 물이 부족하니까 물을 흡수하려고 뿌리를 먼저 내려 땅속에 박는 지혜를 볼 수 있었다. 묘가 올라와서 자라는 도중에 비가 오면 작은 둑을 만들어 물을 대어 물못자리로 관리를 하였다.

참이나 점심을 먹기 전에 밥 한술에 반찬을 얹어 논밭에 던지며 “고시네” “고수레”(귀신에게 먼저 바치면서 하던 소리)라고 소리를 쳤다. 못자리를 만들 때나 논에서 일할 때 새참을 가져오면, 지나가는 아는 분이나 이웃 논에 일하는 분들에게 “참 먹고 가라.”고 큰 소리로 불렀다.막걸리 한잔을 주고받으며 잠시 쉬고 정도 키워갔다. 이게 농촌의 훈훈한 인심이었다.

보온절충

필리핀 국제 미작 연구소에서 동계증식한 기적의 통일벼(IR667) 종자가 1972년 3월 하순에 우리나라에 도착하였다. 농촌진흥청 산하 도 진흥원, 전국의 시군 농촌지도소, 읍면 지소의 농촌지도사들이 통일벼 재배면적 확대를 전담하였다. 군 단위 통일벼 시범단지 를 만들고 회장을 선출하였다. 종자량이 적게 배정된 면에서는 재배를 희망하는 개별 농가에 배부하였다. 긴 통일벼를 보고 모두가 놀랐다.

수량이 일반벼보다 배 이상 난다는 말에 배고픔을 빨리 해결하려는 마음에 재배하였다. 읍면지소에서 시범단지 회원과 개별 농업인에게 통일벼 재배 교육을 하였다. 온도에 민감하여 일찍 모를 심으려고 묘판에 비닐을 씌워 4월 상순에 보온절충 못자리를 만드는 것은 우리나라 벼농사 역사상 처음 이었다. 일주일 정도 물에 담그며 매일 새 물로 갈아 주었다. 종자를 건져서 가마니에 담아 회관 방에서 2~3일 30~32℃ 정도 따뜻하게 하여 0.1mm 싹 틔우기를 할 때 담당 지도사, 회장은 밤을 지켰다. 통일벼 첫 재배는 국가의 중요한 식량 증산 시책이었다. 첫해의 성공 여부에 따라 식량 자급의 명운이 걸려있었다. 싹을 틔우고 못자리 만들 때는 지역 담당 지도사는 매일 와서 지도를 하였다.

4월 상순에 물못자리와 같이 네 모서리에 말뚝을 박고 새끼 줄을 쳤다. 고랑의 흙을 망 위로 퍼 올리고 고른 후 물을 빼고 이삼일 굳혔다. 두부같이 굳은 모판에 싹이 난 종자를 고르게 뿌리고 깨끗한 산 흙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덮었다. 대나무 골주를 60cm 간격으로 반원이 되도록 꼽고, 묘판 비닐(폭 180cm 두께 0.03mm)을 양쪽에 서서 팽팽하게 당겨 덮으며 고랑의 흙을 파서 비닐 위에 올렸다. 고랑에 묘판 높이만큼 물을 대면 보온 절충 못자리가 완성되었다.

보온절충못자리

 

관행의 농법을 새 농법으로 바꾼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였다. 통일벼는 수량이 배로 난다는 교육을 받고  처음하는 보온절충 못자리를 하게되었다. 4월 상순에 파종된 보온절충 못자리는 5월 상순 묘 잎이 3매 정도 나왔다. 모판 위에 물을 올렸고 일주일 정도 환기 작업(낮엔 한쪽 비닐을 들어 반대편 고랑에 두었다가 밤엔 덮어 준다.)으로 모를 튼튼하게 한 후 비닐을 완전히 벗기고 물못자리와 같이 관리하였다. 날씨가 좋은 날 환기를 시키지 않으면 모 잎 3매 이상 된 모는 고온장해로 모 잎이 희게 탔다. 외 기온이 15℃ 정도이면 비닐 속 온도는 50℃ 가 넘어 고온 피해를 입었다.

한쪽비닐을

 

묘 잎이 3매까지는 벼 속의 양분으로 성장하기 때문에 고온 저온의 피해가 적었다. 3매 이상부터는 뿌리에서 빨아들이는 양분으로 생장하기 때문에 기온에 민감하였다. 상주지역에서는 통일벼를 1모작으로 일찍 모내기하여 첫해 대풍작을 이루었다. 타작을 하면서 모두가 놀랐다. 일반벼를 재배하였을 때 반도 안 차던 뒤주에 다 넣을 수가 없어 함석을 말아 마당에 간이뒤주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보리 후작으로 모내기를 늦게 한 남부 지역에서는 이삭이 늦게 팼고 벼가 익지 않아 피해를 본 지역도 많았었다. 성공한 지역은 재배면적이 확대되었으나 실패한 지역에는  통일벼 면적 확대에 어려움이 있었다.

많은 농가는 통일벼 재배 농가에서 종자를 자율교환하였고, 일찍 모내기를 하려고 파종한 보리를 갈아 엎었다. 보온 절충 못자리는 세월이 지나면서 환기 작업도 칼로 비닐 위를 일자(‘-’)로 여러 곳을 찢어 낮에는 벌어져 뜨거운 열이 나가고, 밤에는 일자로 되어 보온이 되었다. 새끼줄 치기, 흙덮기 작업을 생략하고 어떤 농가는 대나무 골주도 생략하고 묘판 위에 비닐을 바로 덮는 평상식 보온 못자리도 설치하였다. 강우 시 비닐 위에 물이 고여 피해를 보았다.

대나무

 

바르는 못자리는 보온절충 못자리같이 묘판을 만들어 두부같이 굳었을 때 침종 된 볍씨를 뿌리고 나무칼이나 삽 등으로 볍씨가 안 보일 정도 누르며 바르는 못자리도 하였다. 그대로 방치하면 묘판이 마르고 갈라지면서 벼가 올라오고 3~4cm 정도 자라면 묘판에 물을 올리고 물못자리와 같이 관리하였다. 바르는 못자리는 경남 창녕 지역에서 시작되어 대구 경북 일원에 확대되었다. 80년대 중반 기계모가 확대되면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