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감영공원의 선화당
대구 중구 골목투어 1코스(경상감영달성길) 첫 번째 구간은 '감영공원'이다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경상감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감영은 조선시대 각 도를 관할하던 관청으로 전국에 8곳이 있었다. 경상감영은 조선 건국 초기에는 경주에 있다가 세종조에 상주로 옮겨 설치 되었으며 이후 경상도를 좌도 우도로 분도 혹은 합도하는 문제들과 얽혀 한때는 성주 속현 팔거현(칠곡,1593)과 달성(1596)에, 안동(1599)을 거쳐 1601년에 대구로 옮겨와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자리를 잡았다. 1896년 지방행정이 13도 제로 개편되면서 경상북도의 중심지 역할을 하다가, 1910년 경상북도 청사가 들어섰다. 그 후 1966년 경북도청이 산격동으로 옮겨가면서 지금의 경상감영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약 1만 6천500여 제곱미터의 공원안에는 선화당과 숙소로 쓰던 징청각, 관찰사와 대구판관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29기의 선정비, 측우대와 하마비 등이 있는데, 이번에는 선화당에 대해 살펴보고 다음 기회에 징청각, 하마비 비림 등에 대해 살펴 본다.
선화당(대구유형문화재 제1호)은 감영의 수장인 관찰사가 집무를 보는 곳인데, 관찰사는 종2품의 문관으로 감사(監司), 도백(道伯), 방백(方伯) 등 여러 별칭으로 불렸는데, 관찰사는 지방관에 대한 규찰과 지방장관으로서 왕권을 대행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왕권의 대행자로 행정, 사법, 군사 등 경상도의 통치 행정상의 일체의 권한과 책임을 지고 있어 권력도 대단했다.
관찰사는 도내 수령에 대한 지휘권과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통제권을 가졌고, 중요한 정사에 대해서는 중앙의 명령에 따르지만 도의 장으로 경찰권, 사법권, 징세권을 행사하는 절대 권력자였으며, 1446년(세종28)부터는 도사(都事), 검율(檢律), 심약(審藥)등의 직속 관원이었다.
경상관찰사의 임기는 그리 길지 않아서 대개는 1년 정도가 많았는데, 5개월 이하도 34명이나 됐다. 관찰사가 임기를 채우지 못한 것은 부정부패가 많아서 였다. 특히 재판과 관련된 부정이 끊이지 않아서. '군수 한 번 하면 3대가 호강하고 관찰사 한 번 하면 8대가 영화를 누린다'는 말이 이때 생겨 났지만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는 관찰사도 많았다.
선화당 천장에는 용그림이 있는데, 예부터 용 그림은 왕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니 선화당의 용 그림은 왕권을 대행하는 관찰사의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선화당 앞에는 경상감영의 측우대(국보 제330호)가 있다. 화강암으로 된 측우대는 높이가 46cm의 장방형으로 만들어 졌으며 전면에 '측우대 건륭 경인년 오월 조'라는 글로 봐 1770년(영조46)에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측우대는 모형이며 실물은 기상청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