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나의 그때 그 시절] 이종환 경북대 명예교수 ②중학교 시절
이종환 교수는 1953년 출생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일어일문학과 명예교수 대구사회문화대학 부학장
1967년 중학교 2학년 어느 봄날 수업 시간.
박락환 담임 선생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다.
"제1차 5개년 경제 개발(1962-66)이 막 끝났다. 우리나라는 지난 5년간 연평균 두 자릿수로 성장했다. 성장률만 따진다면 세계 1등이다. 이 같은 고도 경제 성장이라면 숫자상으로 50년쯤 뒤에 우리나라는 세계 10등 안에 드는 부자 나라가 된다. 나는 이런 자랑스러운 나라를 못 보지만, 너희들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자신감과 긍지를 가져라! 열심히 공부해서 우리나라를 꼭 부자나라로 만들어라!"
박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우리 반 학생들은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박 선생님의 미래 지향적인 예언을 믿든 말든, 그것은 한 가닥의 희망이자 청량제였다. 우리 반 친구들은 서로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웃음을 지으면서 기뻐했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어려운 현실을 되돌아보면 두 자릿수 성장률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당장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못 가지고 등교한 친구들이 여러 명 있었다. 점심시간에는 같은 반 친구들의 눈을 피해서 슬그머니 운동장으로 나가는 친구들의 뒷모습!. 그때는 그래도 운동장 한 귀퉁이에 있는 샘물은 참 맛이 좋았다.
어느 날의 이야기이다. 평소처럼 점심 도시락을 먹고 운동장에 나왔다. 친구들과 야구 또는 농구 시합을 하면서 점심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그날은, 나와 아주 친한 김모 학급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서 학교 구내매점에서 파는 빵을 하나 사달라고 하였다. 평소 말이 없는 내성적인 친구였다. 특히 나와는 야구 관계로 아주 친했다. 야구 투수로 이름을 날리던 친구였다. 순간 내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마침 2원이 들어 있었다. 그 돈으로 그 친구에게 빵 하나를 선물했다. 그 덕택에 영도 집까지 걸어서 돌아갔다. 그 당시 버스 요금이 2원이었다. 대신동에서 영도까지는 어림잡아 약 12km 거리이다. 그 친구는 결국 고등학교에 진학을 못 했다. 그 당시 집안 사정으로 고교 진학을 포기한 친구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어느 중학교 학생 대대장을 한 친구의 이야기가 지금도 귓전에 맴돈다.
야외 소풍 갈 때, 선생님들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집안 사정으로 손수 도시락 마련을 못 하고, 다른 친구에게 부탁해야만 했던 아름답고 슬픈 추억담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