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50)

시집에서 떳떳한 며느리로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자식이 필요했다 영천댁은 팔자에 없다 던 아들을 삼신할미께 점지를 받았다 늙어지면 노망이라더니 누구네 집엔 아들이 없나! 집집마다 다 있는 아들을 두고 어찌 저럴까

2022-02-07     이원선 기자
2월

피를 나눈 자식에게 회초리를 든다면 훈계와 버릇을 고친다며 토를 다는 이가 없겠지만 마당 건너가 십 오촌이라고 팥쥐 엄마로 전락은 시간문제다. 속 모르는 동네 아낙네들은 내 자식이면 모질게 매를 들까? 하고 일일이 토를 달려고 든다. 내 입안 음식을 자식 입에 넣으면 사랑이지만 계모 입안 음식을 건넨다면 구박이자 천시라고 흉을 보는 것이 세상사 인심이다. 어머니지만 이미 어머니가 아닌 마녀로 전략이다. 입방아가 날로, 날로 대단할 것이다. 어찌 동네에서 떳떳하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까?

그 뿐만 아니라 아들을 못 낳는 여인의 생은 이래저래 비참하다. 이는 조선 19대왕 숙종의 가계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숙종의 정식 왕비는 인경왕후다. 슬하에 공주만 두 분이다. 이후 계비로 인현왕후와 인원왕후가 있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다. 후궁 장희빈과 숙빈 최 씨와 명빈 박 씨에게서만 왕자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세분의 왕비는 역사서의 기록이 후궁에 비해 미미하다. 반면 후궁이지만 장희빈과 숙빈 최 씨는 아들(후일 경종과 영조)을 낳았기에 조선왕조실록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 또렷하다. 게다가 인현왕후는 폐서인으로 사가로 쫓겨났다가 겨우 복위되는 우여곡절까지 겪는다. 영천댁도 시집에서 떳떳한 며느리로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자식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들이 필요했다. 시어머니께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안겨 우리 며느리, 우리 집 대들보같이 귀한 며느리로 인정받고 싶었다.

“아이고 우리 똥강아지 오늘은 비린 반찬이 올라 왔네! 이 할미랑 같이 먹자! 맛있게 먹자!”하고 시어머니가 손자를 무르팍 위에 앉혀서는 숟갈에 고깃점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남들처럼 밥상머리에서 칭얼대는 아들을 두고

“이늠의 자슥아! 이 에미도 밥 좀먹자!”하고는 가슴팍을 풀어 아낌없이 젖을 물리고 싶었다.

“우리 착한 아가야 한 입만 더 먹자!”하고 어르고 달래는 모습으로 알게 모르게 아들을 들어 어미라 뽐내고 싶고 투정도 부리고 싶었다.

시어머니는 앞장을 서서 연신 사뿐사뿐 걷는다. 그새 동산 위로 달이 솟았는지 저만치로 희뿌연 달빛 아래 부처님의 나발이 허옇게 부서져 어른어른하다. 언제 어느 때부터 이 자리에 서 계셨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해오는 바로는 천 년도 훨씬 이전부터 마을을 지켜주시는 수호신처럼 서 계셨다고 한다. 힘들고 어려울 때면 동네 사람들이 내 남 없이 찾아 하소연 겸 치성을 드리는 부처님이시다. 원래도 빼어난 모습으로 나투 신건 아니었지만 수적천석(水滴穿石)이라 비바람에 얼굴의 형체는 하루하루 좀이 슬 듯 허물어지고, 콧날은 인간에 의해 수시로 망가지다 보니 더 볼품이 없어 보인다. 덧없는 세월 속에 사람이 늙어가듯 부처님의 얼굴 위로도 검버섯이 군데군데 거뭇거뭇하게 핀 것이 지난 세월이 켜켜이 내려앉은 모양새다.

초라한 풍채는 세월 탓이겠지만 뭉툭한 콧날만은 인간들의 기자사상(祈子思想)으로 인해 빗어졌다. 동네 아낙네들은 임신을 했다 하면 너 나 없이 콧날을 갈아 먹는 탓에 성할 새가 없는 것이다. 고부 역시 한낱 인간에 불과한 지라 유혹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낮에 찾은 들 절박한 심정에 그 누가 뭐랄까? 양심상 그럴 수는 없어 밤을 빌어 찾는데 검은 덤불 속 저만치서 처량하게 산새가 운다. 어디 내놓고 할 일이요! 쥐도 새도 모르게 다녀가라며 속삭이는 듯하다. 산새 울음소리에 맞추어 고부의 발걸음도 한층 더 은밀해 진다.

시어머니는 대를 이으려면 아들이여야만 한다며, 그 비방으로 이 방법이 최고라며 애타는 마음을 담아 전전긍긍의 심정으로 합장을 한다. 주위를 살펴 긁어서 부스럼처럼 덧난 부처님 코를 부엌칼로 살살 달래서는 물에 타 영천댁에게 건넨다. 영천댁도 이미 작정하고 기다렸다는 듯 군소리 없이 싹싹 비워 마신다. 입안으로 돌가루가 서걱거렸지만 아들만 생긴다면 이보다 더한들 참을 수 있다 여겼다.

그 죄업이 아직도 시퍼렇게 남은 상태다. 아기가 이대로 영영 삶의 끝을 놓치고 나면 콧날을 망친 죄인으로 밝은 날 어떻게 감사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뵐까? 그것도 모자라 철철이 성황당에 들려 주·과·포 등, 재물을 진설하고는 맑은 술로 잔을 쳐서 치성을 드렸다. 이마져도 청솔댁, 시어머니는 성에 차질 않는다며 며느리인 영천댁을 다그치고 다잡아 조상신께, 성주신께, 조왕신께 두 손 모아 싹싹, 빌고 또 빌어 왔다.

그런 고부간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켰을까? 영천댁은 팔자에 없다던 아들을 삼신할미께 점지를 받았다. 귀하디귀하게 새 생명이 자궁으로부터 태동을 하고 마침내 입덧이 시작되었다. 뱃속으로부터 신비로운 움직임이 들어선 후로는 또 어떠했는가? 기왕이면 달의 정기를 듬뿍 받아 튼튼하게 태어나 훌륭한 사람이 되어 달라고 좀 노력을 기울였던가? 비방으로 보름달이 뜨는 초저녁이면 장독 위에 첫 새벽에 길어다 놓았던 정화수를 올려놓고는 한 숨통, 두 숨통으로 서산으로 달이 기울 때까지 양팔을 벌려 받아들이질 않았던가? 태아의 정서 발달에는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다고 해서 어디서 주워들었건 밤이 늦도록 부풀어 오르는 배를 쓰다듬어가며 독백을 하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못 부르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기까지 한 날들은 또 무어란 말인가? 임산부는 먹는 음식조차 가려야 한다고 해서 닭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건만 아기의 피부가 닭살을 닮는다는 말에 국물조차 멀리하고, 아기의 영양에는 비타민이 섭취가 최고란 말에 모양이 동글동글 예쁘고 벌레가 먹지 않아 깨끗한 과일로만 찾고, 아무리 바빠도 뜀박질은 피하여 새색시처럼 조신한 걸음걸이로 나붓나붓 걸어 다니질 않았던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말만 들어야 한다기에 산천 경계를 찾고 아낙들이 모이는 장소는 시어머니의 만류에 역마살로 들썩이는 엉덩이를 꾹 눌러서 참아 오질 않았던가?

마침내 첫 울음소리도 우렁차게 아기가 태어나자 시어머니는 이제야 조상님을 뵈올 면목이 있다며 양 팔은 하늘로 흥에 겨워 나비가 날아다니듯 나풀나풀 춤을 추질 않았던가? 평소에는 더 없는 현모양처라 흥이라고는 모르던 어른이 세상이 달리 보여 절로 어깨가 들썩인다며 마당이 비좁도록 덩실덩실 춤을 쳤다. 삼칠이 지나 금줄이 내려지자 시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온 동네를 휘졌고 다녔다. 영천댁이 꿈인 양 아기를 보듬은 시간 동안 영천댁의 기분을 대신하여 시어머니는 빤 할 새 없이 집을 비웠다.

그간 새벽이면 가위에 눌리는 통에 잃어버린 잠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아기를 품 안에 품어 수시로 잠에 빠지는 영천댁이다. 닭 병이라도 든 모양 꼬박꼬박 졸아서 한낮을 죽이는 영천댁이건만 청솔댁은 기특하고 대견하다는 자랑 질에 입이 근질근질해서 못 참겠더란다.

“나도 이제 할머니가 됐다. 진짜 할미가 됐다. 우리 금 쪽같이 귀한 며느리 덕에 알토란같은 손자가 생겼다”하고 이 집 저 집을 청하지도 않았건만 내 집같이 드나들었다. 동네 사람들이 뒤통수에 대고

“참 별스럽게도 구네! 늙어지면 노망이라더니 누구네 집엔 아들이 없나! 집집마다 다 있는 아들을 두고 어찌 저렇게 티를 낼까?”하고 흉을 보건 말건 치맛자락을 팔랑거리며 좇아서 다녔다. 손자의 백 일을 맞아서는 동네가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였다. 돼지에 염소, 닭을 아낌없이 잡는 통에 동네 사람들은 모처럼 만에 네 발 달린 짐승 고기로 포식을 하고 두발 달린 고기 국물로 입가심을 했었다며 그간의 비웃음은 뒤로 하고

“아기가 참 영특해 보입니다. 장군감이네요!”하는 덕담 등으로 아낌없는 축복이다. 그런데 그때 그 자리에 청솔댁은 할머니가 없는 것이 가슴에 앙금처럼 남았다. 분명 할머니는 슬픈 비애를 한아름 끌어안고는 집을 비웠으리라 여겼다. 이웃사촌이건만 왕래가 끊어진 지도 오래다. 흥에 겨운 잔칫상을 마주하고도 알 듯 모를 듯 깊은 한숨을 내쉬는 청솔댁의 아린 심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복은 골고루 나누어야 하는데 후일 손자를 통해 악업으로 돌아올까 가슴 한구석으로 근심이 서린다.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들끼리 있는 복조차 알뜰살뜰 보살펴 어째서 함께하지 못하는가 싶었다. 하물며 떠돌이 개조차 한입 복을 물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가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