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탐방기
대구지역 시민 언론위. 자유공정 시민위. 대구 문협 문인 합동 청와대 참관
청와대 탐방기
대구지역 시민언론 아카데미와 대구 문인협회, 자유 공정 시민회의 등의 회원 44명이 6월6일 청와대 탐방을 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상징인 청와대가 개방된 지 한 달이 됐다. “봄꽃이 지기 전에 국민들에게 돌려 드리겠다”며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날부터 하루 3만 9천 명씩 추첨을 통해 관람한 사람들이 100만 명이 넘어섰다.
마침 그날은 현충일이다. 일행은 아침 6시 30분에 어린이회관에서 출발했다. 이날 나라를 위해 숨진 선열들을 기념하는 날에 청와대를 관람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 회원들은 버스 안에서 잠시 묵념하기도 했다. 심각한 가뭄이 계속되다가 대구에서 서울까지 가는 고속도로는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도 모두 아무런 불평 없이 이동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서울 하늘은 황사조차 빗물에 씻긴 탓인지 맑고 화창했다. 일행은 많은 인파가 몰리는 영빈관 코스보다 하얀색 건물에 ‘춘추관’이란 현판이 붙은 동쪽으로 입장했다. 25년 전에 만들어진 이곳은 청와대 출입 기자들이 활동하던 공간이다. 평소 TV 뉴스와 신문 지상을 통해 익숙한 곳으로 함께 간 사람들이 대변인이 국정을 발표하던 브리핑 탁자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곳을 출입했던 기자들은 여러 대통령을 두고 양심적으로 기사를 썼을까 생각해보았다.
춘추관을 내려오면 120종류의 나무들이 심어진 녹지원의 시원한 정원은 만평이나 되어 보기가 좋았다. 한가운데는 150년이나 되는 늘 푸른 소나무가 버티고 있었다. 일행은 작은 길을 따라 올라가자 한옥 건물인 상춘재(常春齋)가 나왔다. 외국 귀빈들에게 우리나라 전통 한옥을 소개하기도 하는 등 가끔 비공식적인 행사가 열리기도 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이곳에서 식사하며 담소를 나누었던 곳이다.
그곳을 나와 작은 계곡물이 흐르는 숲속으로 따라 올라가자 조선말에 지어진 전통 건물인 침류각(枕流閣)이 나왔다. 청와대의 작은 연회가 열렸던 곳이다. 이어 언덕길을 오르자 봉황이 붙여진 철문을 지나 제복을 입은 경찰이 경계중인 인수문으로 통했으며 대통령이 살았던 관저 건물이 나왔다.
관저는 대통령 가족들만 살기에는 너무 크게 지어졌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기둥이 벗겨지고 낡아 보였다. 관람객들은 마당을 따라 돌면서 열린 문안으로 들여다보았으나 도구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청기와로 지어진 우람한 팔작지붕과 큰 기둥으로 대통령 가족들만 살기에는 너무 크고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웅장한 절간처럼 여겨졌다.
다시 언덕을 내려오자 대통령의 집무실인 청와대 본관은 인파로 붐볐다. 내부를 보기 위해 수백 명이 두 줄을 서서 기다렸다. 관람객의 가장 관심을 끄는 곳.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붉은 양탄자가 깔렸고, 집무실에는 평소 뉴스에서만 봤던 대통령의 업무용 책상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 대기하거나 관람 시간은 무려 1시간이나 걸렸다. 본관은 노태우 대통령 때인 1991년 9월에 준공됐다. 본관 앞 잔디광장도 녹지원 못지않게 넓었다. 얼마 전 ‘열린음악회’가 열렸던 곳.
본관 인근 산속에는 통일신라시대 석불인 미남 불과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만든 정자인 오운정(五雲亭), 조선시대 왕을 낳은 후궁들의 위패를 모신 칠궁 등은 단체관람이 쉽지 않아 포기하는 대신 나중에 삼삼오오로 조용히 다시 와서 보기로 했다. 경내에는 각종 문화재가 60여 점이나 산재해 있다. 본관을 나와 서쪽으로 조금 내려오자 영빈관이 버티고 있었다. 해외 국빈 방문 시 접견 장소와 만찬장으로 사용된 컨벤션홀이다. 본관 관람에 지친 사람들은 그늘에 쉬거나 일부는 내부를 둘러보는 적극성을 보였다.
청와대 전체 면적은 25만 제곱미터(7만 5,600평)로 서울 여의도공원 면적과 비슷하다. 이곳은 5백 년 전 경복궁을 지으면서부터 후원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북악산이 둘려 있다. 일제강점기는 조선 총독 관사와 해방 후에는 경무대 건물이 있었으나 80년 이후 헐려 버렸다. 총독 관사는 미군정 당시 하지 중장의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날 관람에 나섰던 ‘대구시민 언론위원회’ 4기 안 윤 하 회장(68)의 매일 춘추 칼럼 ‘대통령을 지키는 사람들’에서 청와대를 지키던 경찰이었던 형부가 김신조 습격 사건 당시 순직하는 바람에 27세 된 언니가 백일 된 아들을 키우면서 지금껏 홀로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방종현 수필가의 낭독으로 일행은 잠시 숙연해지기도 했다. 더욱 순직한 형부가 유공자 대우도 못받아 남겨진 유족이 힘겹게 살아왔다는 얘기에 안스러운 마음 금할길 없었다.
‘자유 공정 시민회의’ 회원인 정우상 씨(65)는 “직접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가족과 친구 등 8명이 함께 왔다”며“ 청와대가 이리도 넓기에 대통령과 비서관들의 소통에 장애가 생겼고, 국민들과도 공간만큼이나 거리감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청와대는 특정인이 이용하는 비밀 속에 쌓여 있었다. 박정희 시대부터 어린이날 등에 개방되거나 평소에도 녹지원과 본관 앞 등을 일부 관람객들에게 제한적으로 개방되기는 했으나 늘 닫힌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김대중 정권부터 청와대를 ‘광화문으로 옮긴다’는 공약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된 뒤 가장 먼저 “청와대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건물로 옮긴다”는 말에 문재인 정권의 사람들은 “멀쩡한 공간을 놔두고 굳이 국민의 혈세를 낭비한다”면서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20대 대통령의 취임 당일에 열린 청와대는 이제 국민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동행한 대구문인협회 심후섭 회장은 우리나라 근대역사의 한 산실이었던 현장에 서니 새로운 감회에 젖게된다며 조선시대 궁궐의 아름다운 후원이었던 이곳이 그 동안 여러 차례 외세를 겪으면서 일제 총독관저, 미군 사령관 숙소 등을 거쳐 우리나라 초대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 쓰이면서 치욕과 영광이 함께 배어 있는 현장이 되었지만 이제 온전히 시민의 품에 돌아옴으로 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 되었으므로 이 순간을 느끼기 위하여 방문하게 되었다며 그 소회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