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 그루의 나무 흙의 시학, 최춘해 아동문학가

최춘해 선생의 문학인생 55년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90분 동안 들려줘

2022-07-13     유병길 기자

 

대구 문학관은 ‘대구의 힘, 문학의 힘’이란 주제로 7월 12일(화)~12월 29일(목) 매주 화, 목요일 15:00~16:30분. 4층 세미나실에서 강연을 개최한다.

 

첫 강연은 7월 12일 15:00~16:30분. 4층 세미나실에서 아동문학가 최춘해 선생이 강연을 하였다. 최춘해 선생의 강의는 김성민 아동문학가가 질문하고 최춘해 선생이 답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김성민: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문학에 대해 본격적인 말씀 듣도록 하겠습니다. 1967년 《매일신문》신춘문예에 「겨울 땅속」으로 동시 입선 등단 《한글문학》에 「시계」 「산 위에서」 「이른 봄」으로 추천 완료되셨는데 벌써 시력 55년이 됐습니다. 등단하실 때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최춘해 :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선한 작품이 ‘겨울 땅속’입니다. 심사위원은 김성도 이재철 김진태 세 분입니다. 입선된 작품 내용은 “겨울 땅속은/엄마 같은 마음//매운 추위에 감기 들까봐/ 개구릴 불러들이고/뱀도 씨앗도 불러들였지.//겨울 땅속은/선생님 같은 마음.//그 많은 씨앗과 풀들이/ 때를 가려/잎 피고 꽃 필 줄 알고/ 알맞게 자랄 줄 알게 해 주네.” 교육성이 겉으로 드러난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신춘문예 작품이 발표될 무렵에 서점에서 <한글문학>이라는 책에서 신인을 공모하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얼른 투고를 했습니다. ‘산위에서’, ‘시계’, 두 편이 1회 예선이 되었습니다. 조유로 씨가 심사를 했습니다. 이어서 ‘이른 아침’이 당선 완료 작품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심사는 이원수 선생이었습니다. 요즘은 문학잡지가 많지만 당시는 신인을 공모하는 문학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한글문학>은 안장현씨가 부산에서 발행했는데 당시는 아주 귀한 문학잡지였습니다. 이원수 선생의 심사평을 일부를 옮겨보면 이른 아침 안개를 알을 품은 암탉처럼 느끼는 일은 반가운 일이다. 더구나 안개비를 새싹의 젖줄로 보고, “새싹이 눈을 감고/ 강아지처럼 젖을 빤다”고 한 끝 연에서 이 동시는 뛰어난 광채를 보게 해주었다고 했습니다. 이 동시는 5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김성민: 등단하던 해에 첫 동시집 『시계가 셈을 세면』(한글문학사)이 같은 해에 출간하실 수 있었었습니까.

최춘해: 어린이들에게 글짓기 지도를 하면서 본보기 글 자료로 내가 쓴 작품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글짓기 연수회를 할 때 자신의 작품을 가져와서 합평도 함께했습니다. 신현득과 김종상은 이미 등단을 해서 동시집을 냈습니다. 같은 회원이지만 지도자 역할을 했습니다. 칭찬을 많이 해 주어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영남일보에 계속 작품 발표를 했습니다. 원고료를 받는 건 아니지만 습작을 하는 처지에서는 자기의 글이 신문에 발표되는 게 기뻤습니다. 영남일보 덕에 많이 쓸 수 있었고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북아동문학회에서 연수를 할 때 밤을 새워가며 작품 합평을 계속한 덕에 작품을 많이 쓰게 된 것 같습니다. 등단 전에 작품 수련 기간이 꽤 오래되었습니다.

▸김성민: 첫 동시집 『시계가 셈을 세면』이 나오기까지의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최춘해: <내가 만난 이원수> 제가 이원수 선생님을 처음 대한 것은 65년도 여름방학 때였다. 당시 상주에서는 학교 선생님들이 상주 글짓기회를 만들어서 글짓기 지도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동시의 마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상주 아이들 글이 신문, 잡지 등에 많이 발표되고, 글짓기 콩쿠르에서도 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글짓기 지도 선생님들이 동시를 열심히 썼습니다. 당시 전국 아동문학 교단동인회가 있었는데, 상주에 회원들이 많아서 교단동인회 본부를 상주에서 맡게 되었습니다. 이원수 선생님을 이 교단동인회의 고문으로 모셨습니다. 교단동인회에 대한 지도 말씀도 듣고 문안을 드리기 위해 상주에서 김종상, 이천규, 나, 세 사람이 서울 사당동 선생님 댁을 방문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온 얼굴에 웃음을 띠고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이야기 끝에 내 습작 노트를 보여 드렸습니다. 교단동인회 회보에 묶인 작품 말고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시골의 낯선 문학 지망생을 선생님은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제 작품 노트를 기꺼이 받아서 격려의 말씀을 주시면서 두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남의 작품을 봐 준다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당시는 미처 몰랐습니다. 같은 습작 노트를 다른 대가에게 보였더니 귀찮다는 듯 봐주지 않는 걸 보고 원망을 하기도 했습니다. 받아주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기꺼이 받아주는 이원수 선생님은 인정이 넘치는 특별한 분이셨습니다. 며칠 뒤에 제 습작 노트를 군데군데 붉은 글씨로 알뜰히 수정을 해서 보내 주셨습니다. 감탄을 했습니다. 나도 나중에 이원수 선생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원수 선생님이 한국아동문학가협회 회장이었을 때 회에서 개최하는 총회, 세미나 등 모든 행사에는 이원수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빠지지 않고 참석을 했습니다. 이원수 선생님과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아동문학에 더 열정을 쏟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 뒤에도 선생님으로부터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보답을 못 한 것이 늘 빚이 되어 무거운 짐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한글문학>지에서 추천을 받은 것과 제 첫 동시집에 머리글을 받은 것이 제 문학의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책머리에> 시를 읽는 어린이들에게

많은 어린이들과 매일 같이 사는 어른, 밤낮으로 어린이들을 위해 애쓰는 어른, 그런 분이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스스로 어린이가 된 마음으로서 쓴 시의 꽃다발이 여기 있습니다. 이 시들은 어린이들을 가르치기에 항상 바쁜 세월을 보내는 교사의 직책과는 달리, 어린이들의 마음을 얼싸안고 웃고 울고 즐기고 슬퍼하는 예술의 세계의 꽃입니다. 최춘매 선생은 어린이 여러분의 지식과 도덕을 위해 가르치는 선생이지만 그러한 것을 가르치는 이상의 귀한 것을 이 시들로서 여러분에게 선사하고 있습니다. 여기 모은 동시 가운데 어느 한 편에서 어쩌면 1년의 학교 공부와도 맞설 귀한 것을 여러분이 선물로 받을지도 모릅니다. 시를 읽는 즐거움을 깨쳐 아름다운 생활로 찾아들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시들을 읽으며 여러분도 시를 쓰는 시인이 되는 길에 들어설지도 모릅니다. 아니, 최춘매 선생의 시는 꼭 어린이 여러분의 손을 잡고 같이 이끌어 가주는 그런 시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이 동시집이 나오는 것은 여간 반갑고 기쁜 일이 아닙니다.

                                                                       66년 9월 이 원 수

제 첫 동시집 『시계가 셈을 세면』이 나오기까지 이원수 선생과 더불어 김종상 선생, 신현득 선생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김성민: 상주에서 교직생활을 하실 때 교단문학 동인회 활동과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최춘해: 아동문학 『교단』 동인회의 발자취 말을 옯겨 보면, 63년 7월 14일 신현득, 오규옥, 옥미조, 하계덕 발기로 대구칠성초등학교에서 발족. 『전국 교사 아동문학회』로 가칭. 간사 신현득 당시 회원 김동극, 강청삼, 김종상, 김원기, 엄기원, 이진호, 이천규, 임교순, 허동인. 매월 1회씩 작품을 교환하고 전호 작품에 대한 각자의 평을 하기로 함. 동인지의 명칭을 “은방울”이라고 정함. 회장이 없고 간사가 회무를 집행하기로 했다. 63년 8월 1일에 『은방울』 1호가 나오기 시작해서 64년 6월 15일까지 신현득 간사가 『은방울』 10호를 내었다. 65년 3월 16일 동인회 본부를 경북 상주군 사벌초등학교로 옮기고 간사업무를 최춘해가 맡았습니다. 65년 4월 5일에 『은방울』 18호를 내고 5월 6월에 19호 20호에 이어서 65년 7월 1일에는 『은방울』 21호를 처음으로 인쇄판으로 발행했습니다. 65년 12월 1일에 『은방울』 27호도 인쇄판으로 발행했습니다. 등사판으로 낸 것은 다 없어지고 인쇄판 발행 21호와 27호만 남아 있습니다.

65년 6월에 중앙일보 최종률 문화부 기자가 내가 근무하는 사벌초등학교에 교단아동문학동인회 활동 모습을 취재하러 왔습니다. 시골이라 여관이 없어서 학교 사택인 우리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갔습니다. 곧 중앙일보 문화면에 전면 특집을 했습니다. 교단아동문학동인회의 발족부터 다달이 『은방울』을 발간하는 과정, 활동이 왕성한 회원들의 소개, 초대 간사를 맡았던 신현득씨의 작품 소개, 『은방울』 동인지의 사진 등이 내용이었습니다.

▸김성민: 80년 연작 동시 「흙」으로 제6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으셨습니다. 이때부터 ‘흙의 시인’으로 수상과 「흙」 연작시에 대하여 말씀을 들려 주십시오.

최춘해 : 제가 ‘흙’ 연작시를 쓰게 된 동기는 79년 세계아동의 해에 문교부와 한국일보사가 공동으로 작품모집을 했는데, 제가 응모한 흙 연작 8편이 금상으로 뽑혔습니다. 금상 수상을 하고 나서 계속 흙 연작시를 쓰고 싶었습니다. 79년 8월 15일에 동시집 젖줄을 물린 흙을 발간했습니다.

80년 1월 15일(화) 시사통신에 제6회 한국아동문학상 수상자 결정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냈습니다. ‘최근 수년 동안 활발한 작품활동을 해 온 최춘해씨는 문예진흥원의 출판기금 지원을 받아 지난 해 동시집 『젖줄을 물린 흙』을 낸 바 있고, 아동의 기념 전국아동문학 작품모집에서 최우수상 금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최춘해씨의 수상작은 연작 동시 『흙』이다. 원고료 20만 원 지급된다.’ (시사)

제가 ‘흙’ 연작시를 쓰는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농촌에서 태어나 농촌에서 자랐으며 흙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나도 흙의 한 부분입니다. 봄에 새싹이 돋고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보고 흙이 신비스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동심의 원초적 생각인 물활론의 눈으로 흙을 보게 되었습니다. 흙을 소재로 동시를 썼습니다. 79년 세계 아동의 해에 문교부와 한국일보사 공동 주최로 세계 아동의 해를 기념하여 동시 동화 현상모집을 하였습니다. 시․도 대회를 거쳐 전국 대회로 이어졌습니다. 흙 연작 동시 8편을 투고하여 전국 대회에서 동시 부문에 금상을 받았습니다. 그 뒤부터 흙을 연작으로 쓰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흙은 뿌리, 어머니, 고향 등 여러 가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런 넓은 의미의 흙을 작품으로 승화시키자는 것입니다. 흙을 사랑하는 것은 고향을 지키는 것이요, 전통을 살리는 것입니다.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배우고 슬기를 얻고 바르게 사는 방법을 배웁니다. 사랑을 배우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을 배웁니다. 여기서 흙이라고 한 것은 흙 한 가지만이 아니라, 자연 모두를 통틀어 말한 것인데, 그 가운데 대표되는 것이 흙이란 뜻입니다. 한국동시문학회 여름 연수회 때 제가 쓴 흙 연작시 82편을 주제별로 분류해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흙 연작시를 101편을 썼습니다.

▸김성민: 98년 교직에서 은퇴하시고 2003년 드디어 선생님의 이름을 걸고 ‘최춘해아동문학교실’을 열게 됩니다. 그 배경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최춘해 : 1998년에 교직에서 퇴임을 하면서, 제가 봉사할 수 있는 일은 아동문학을 오래 했으니 아동문학 강좌를 개설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장소를 찾았습니다. 도서관 복지관 교회 등을 찾아갔으나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무료로 쓸 수 있는 장소를 찾던 중 그루출판사 이은재 사장께 이야기했더니, 우리 사무실에서 하라고 했습니다. 2003년 9월에 최춘해 아동문학 교실이란 이름으로 강좌를 개설했습니다. 월요일에는 오전반, 화요일에는 오후반으로 나누어 강의를 했습니다. 수강료를 받지 않고 무료로 했습니다. 전기세, 여름에는 에어컨, 겨울에는 난방비 등도 무료로 했습니다. 이은재 사장님도 넉넉하지 않은 데도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당시에 MBC나 개인으로 아동문학 강좌를 개설했다가 수강생이 없어서 강의를 그만두었는데, 제가 개설한 강의는 수강생이 많아서 1년 뒤 수료생이 28명이나 되었습니다.

제가 최춘해 아동문학 교실이란 이름으로 강의를 한 것은 2003년부터 만 10년 동안입니다. 제가 강의를 시작할 때부터 만 10년만 하고 그 다음에는 제자들에게 물려 줄 생각을 했습니다. 만 10년을 마친 뒤에 오전 강의는 안영선 선생이 맡고, 오후반 강의는 정순희 선생이 맡았습니다. 제가 강의하던 교재와 강의 자료를 그대로 물려주었습니다. 제가 무료로 봉사를 했으니 물려받은 선생님들도 무료 봉사를 했습니다. 물려준 뒤에도 다음 해 수강생 모집은 제가 맡고 있고 처음 한 달 동안 기본이 되는 내용은 해마다 제가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강좌 이름도 최춘해아동문학 교실에서 혜암아동문학 교실로 바꿔서 물려주었습니다. 물려준 뒤에도 제가 강의를 할 때와 같이 수강생도 많고 차질 없이 강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강의하는 분이 오전반은 정순오 선생이, 오후반은 권영욱 선생이 맡고 있습니다. 올해 19기가 수료하고, 20기 교육을 7월 5일부터 시작 하였습니다.

▸김성민: 55년 문학인생을 돌아보시면서 아쉬웠던 점이나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최춘해 : 농촌에서 대구 도시로 온 뒤에 10년 동안 작품을 못 쓴 것이 후회가 됩니다. 농촌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좋은 작품을 많이 썼을 텐데 도시로 이사를 한 탓에 작품을 못 썼습니다. 제가 한 동안 제 작품에 대해서 홀대를 했습니다. 내가 낳은 자식을 푸대접하면 누가 내 자식을 귀엽게 보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 뒤부터 다시 생각을 가다듬고 작품을 쓰게 되었습니다. 올해 동시집이 11월에 나올 예정이고 앞으로도 목숨이 다할 때까지 계속 책을 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성민: 혜암아동문학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 또는 동시나 동화 쓰는 것에 관심 있는 일반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동시를 잘 쓰기 위해 필요한 것 등)

최춘해 : 제 경우는 농촌에서 나서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연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어릴 때 자연과 더불어 산 것이 글 쓰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책이 귀할 때라서 책을 많이 못 읽은 것이 후회가 됩니다. 책을 많이 읽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문학뿐만 아니라 책을 많이 읽으면 지헤롭게 생각하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력이 생기고, 동시 동화를 많이 읽으면 굳이 작법을 배우지 않아도 작품 쓰는 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작품뿐만 아니라 세계 명작을 읽으면 세계적인 작가가 됩니다. 한 가지 더 부탁한다면 일기를 꼭 쓰기를 권합니다.

제가 수강생들에게 우리들의 마음 가짐 세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첫째 우리는 정으로 산다. 둘째 좋아하면 잘하게 된다. 셋째 계속하면 열매을 맺는다. 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