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 갓바위와 선본사, 그리고 도수 스님④

2022-07-25     강효금 기자
비가

3)팔공산 갓바위 불상 소유권 소송, 그 이야기①

당시 선본사는 극락전 앞으로 동쪽에는 낡은 기와집, 서쪽에는 초가집이었고 극락전 앞 남쪽(현 선정루)에도 초가집, 산신각만 온전하게 함석지붕으로 덮여있었다. 극락전의 부처님은 좌대도 없었다. 장맛비가 억수 같이 퍼붓던 날, 마루에는 물이 흥건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밤, 우선 부처님을 가장 안전한 산신각으로 옮겨야 했다. 덩치가 큰 나로서도 불상의 무게는 만만치 않았다. 부처님을 껴안고 나오다 마루에 고인 빗물에 발이 미끄러져, 불상의 엉덩이 부근 복장물을 넣고 막아둔 뚜껑이 빠지면서 안에 들어있던 복장물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한눈에 귀한 유물임을 직감했다.

『선본사사적기』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순간이었다. 그 책에는 ‘갓바위 불상’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었다. “천여 년이 지났는데 석상은 의연하게 단아한 자비로운 용모로, 불상을 보고 감흥이 일어나 기도와 축원을 올리면서 응답을 얻은 사람이 많다. 이것은 의현 화상의 공이다”라고 했다. 마지막 문장은 “천년 갓바위 불상의 위엄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많은 이의 염원을 이루어 주는 불상의 영험, 그리고 갓바위 불상을 조성한 의현 스님의 존재” 등을 기록하고 있었다. 은해사 주지 스님을 찾아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선본사사적기』는 큰절에 보관하고 나머지 불경은 그대로 다시 넣고 봉함하였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도 선명한 사실. 갓바위 불상이 선본사 소유임을 밝히는 귀중한 단서였다. 밤새워 뒤척이며 누구를 찾아 도움을 청할지 궁리했다.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벌이는 소송. 모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형국이라며 무모하다고 했지만, 갓바위 불상을 둘러싼 그 논쟁을 마무리하라는 부처님의 계시처럼 여겨졌다.

박정희

박재희 여사와의 인연과 경계측량

갓바위의 정확한 경계측량을 위해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무일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무작정 박정희 대통령의 막내 누나가 사는 상주군 청리면 삼괴리를 찾았다. 박 대통령은 맏형 동희東熙(子 국회의원 在鴻), 둘째 무희武熙(子 국제전기회장 在錫), 셋째 상희相熙(子 축구협회회장 在福, 사위 국무총리 金鍾泌), 넷째가 정희正熙(대통령) 4형제로, 박대통령의 누나는 위로 맏자형은 은용표殷龍杓 부인은 박수희朴水熙, 둘째가 한정봉韓禎鳳의 부인인 박재희 여사였다.

상주군 청리면까지 버스로 도착하여 삼계리 마을까지 걸어갔다. 한여름이라 집에 들어서자마자 갈증이 나서 물 한 모금을 청했다. 박 여사는 웬 스님이 왔느냐며 시장해 보인다고, 풋고추 5개에 된장 한 종지, 꽁보리밥 한 상을 내왔다. 넉넉지 못한 형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허겁지겁 밥을 떠 넣고 풋고추를 한 입 베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따끔하더니 입으로 피가 번져 나왔다.

“아이구, 이를 어째!”

박 여사가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수건을 입술에 갖다 댔다. 고추 속에 있던 벌레가 사정없이 입술을 깨문 것이었다. 상을 물리고 박 여사가 얘기를 꺼냈다.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양쪽에 목발을 짚고 스님 한 분이 들어와서 합장을 하더니, 그만 자기 앞에서 목발을 八자로 하여 거꾸러지더라”고 하면서, 지금 보니 스님이 꿈에서 본 ‘중님’이시다고 하였다.

“백일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대통령 각하를 위하여 기도하고, 나라가 잘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대구에 갈 일이 있는데 그때 가면 연락하겠다며 주소를 적어달라고 하였다.

1주일이 지났을까? 선본사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한 사람이 찾아왔다. “지금 스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니 어서 가셔야 합니다.”

그때는 와촌면 소재지까지 자동차도로가 없어서 걸어서 지서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지프에 몸을 맡기고, 도착한 곳은 대구 북구 침산동 선학알미늄공장 안에 있는 사택이었다. 뒤에 알고 보니 그날 안내한 사람은 경산경찰서 정보계장이었다.

이날 선학알루미늄 사장 장영봉張永鳳(1914~?)의 부인 황경순 여사와 동석하여 갓바위 불상 소송에 대한 경과를 이야기하고, 갓바위 경계측량을 할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원고는 선본사, 피고는 국가인 소송. 변호사, 판검사, 측량사, 모두가 국가편인데 그 소송에서 이길 수 있을까? 하지만 최선을 다해야 했다.

“갓바위 정상이 달성군과 경산군 사이 경계구역입니다. 처음 측량은 달성군 지적계에서 했는데, 갓바위 불상 보는 방향 우측을 기준점으로 측량하여 달성군 진인동이라고 하였습니다. 정확한 측량을 위해서 박재희 여사께서 측량부대에 측량하도록 부탁드립니다”

박 여사는 “스님 육군 측지부대가 와서 측량하면 도움이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되는지요?”하고 물었다.

“부산 해운대 측지부대를 찾아가서 부탁하였지만, 국방부 장관이나 육군참모총장 명령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 나하고 서울 용산에 있는 육군본부에 가서 부탁하면 되겠습니다.”

그 후 박 여사와 같이 서울 육군본부에 도착해서 수위실에서 참모총장을 만나러 왔다며 기다리는데, 30분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박 여사가 전화를 바꾸어 달라며 얘기한 뒤, 참모총장이 직접 내려와 안내하였다. 총장실에서 장군 7, 8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 여사가 “자네도 여기 있었어?”하고 말을 건네자, 모두 경례했다. 그날 그 자리에, 수많은 별이 자리했다.

총장이 “웬일로 스님을 모시고 오셨습니까?” 하자, 박 여사는 “육군에 측량부대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방문한 이유를 말했더니 즉석에서 측량부대에 “측량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후 8명의 장병이 긴 측량기구인 장대를 가지고 1915년(大正4)부터 1938년(昭和13) 측량지점 표식을 찾아서 영천 80리부터 현황측량을 실시하였다. 최신식 기계로 국내 최고의 기술자가 측량한 알루미늄판에는 경산군 대한리 산44번지(TM 중부좌표: X356628 Y277405) 소재라는 답변서를 작성해서 법정에 제출하였다. 현장검증에서 측량에 참여한 분의 증인선서도 이어졌다.

도움을 주신 분들을 위해 천일기도를 시작했다. 모든 것이 부처님의 섭리였다. 하루는 박 여사가 대통령 영애인 근영 씨와 함께 선본사를 찾았다. 함께 기도하고 하루를 묵고, 그다음 날 선본사를 떠났다.

갓바위

동국대학교 황수영 박사의 증언과 소송경비를 시주한 윤달금 보살

동국대학교 불교사학자 황수영(1918~2011) 박사는 한국불상연구의 권위자로 갓바위 현장까지 와서 선본사의 불상이라는 것이 확실하다고 현장 법정 증인으로 진술하였다. 처음 방문 부탁했을 때 황 박사는 그 당시 51세로 천주교 신자인데 문화재위원으로 선본사에 내려가지 못한다고 못 박았다. 생각 끝에 동화사 주지를 역임한 동국학원 이사장인 서운 스님(1903~1995)을 찾아가서 경위를 말씀드리고 이사장이 직접 황 교수를 불렀다. 천주교인이었지만, 우리 문화에 특별한 애정을 가진 황 교수는 선본사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을 바꾸었다. 불교문화와 선본사가 지닌 역사, 비 오는 날 불상 안에서 발견한 복장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황 박사의 표정이 달라졌다.

황수영 박사는 서울에서 선본사로 내려와 3일을 함께 지내며 곳곳을 답사하고, 갓바위가 선본사 불상이라는 사실을 법정에서 증언했다. 불교사학자로서 황 박사의 위치를 잘 알고 있기에, 고맙고 또 고마웠다. 소송이 마무리되고, 황수영 박사는 동국대 박물관장과 총장(1982~1986)을 역임하였다. 갓바위 부처는 미륵불이라 알려졌는데, 중생을 구제하는 약탕기와 약병을 든 약사여래불상과 달라 관봉여래좌상으로 불린다.

소송비용을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 시주로 비용을 마련하였다. 꼭 잊지 못할 사람은 당시 대구시 중구에 자리한 ‘은행정’이란 큰 요정을 운영한 윤달금 보살이다. ‘은행정’은 종업원이 50여 명 되는 큰 유흥주점이었다. 목탁을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서면, 윤 사장은 스님이 오셨다며 반가이 맞아주었다. 자신도 시주하고, 종업원들에게도 복을 짓는 일이라며 시주를 권했다. 그렇게 십시일반, 한자리에서 큰 시주를 받게 되었다.

윤 보살은 소송비용이 모자란다는 얘기에,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선뜻 변호사 비용을 건네주었다. 윤근상 동대구경찰서장과는 같은 집안으로, 선본사에 불량배들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거나 할 때면 윤 서장이 앞장서 해결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