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느끼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ㅡ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명시 100선[2004 민예원]
박인환 시인은 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1956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했다. 그는 195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이었다. 명동신사, 명동백작으로 불릴 만큼 당대의 멋쟁이었고 명동에서 예술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노래하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짧은 생애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멋진 삶을 살다간 시인이었다. 그 당시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를 모르면 문화인이 아니랄 만큼 센세이션을 일으킨 시였다.
이 시는 시인이 6.25 전쟁의 체험을 통해 느낀 문명과 인간에 대한 한없는 절망과 좌절을 형상화한 작품이라 한다. 절망적 현실과 인생에 대한 페시미즘적인 태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페시미즘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세상과 인생을 악하고 괴로운 것으로 보고 절망하며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주의라고 되어있다. 이 시가 나올 즈음에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이 무기력해져 허무주의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래서 시가 더 가슴으로 파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목마는 땅에서는 달릴 수 없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허공을 헤맬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목마는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헤매는 인간의 슬픈 운명을 상징하는 것 같다. 시의 시작부터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고 되어있다. 술을 마시는 자체가 기뻐서 축배를 드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허무에 젖어 마시고 페시미즘의 극에 달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버지니아 울프의 슬픈 생애와 땅에 발을 디딜 수 없어 허공에서 헤매는 애처로운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본질이 아닌 옷자락을 이야기하니 얼마나 절망적이고 황당하며 슬픈가. 그런데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니 점입가경이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함도 술병이 다 비워져 마지막 남은 술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걸 말한 것이리라. 또한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했지만 정작 부서지는 것은 내 가슴이리라.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사람마저 보이지 않으니 어디에 마음을 기댈 수 있으랴.
그 때는 목가적인 서정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니 서구적이고 도회적인 시 목마와 숙녀는 큰 반향을 일으킨 것 같다. 더군다나 페시미즘의 극을 달리고 있는 영국의 유명한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를 내세워 시의 의미를 증폭시켜 독자들에게 꿈같은 서양문물을 간접적으로나마 맛볼 수 있게 해주었다. 현대인이라면, 말할 때 영어 단어 몇 개라도 섞어 쓰면 유식해 보였고 양주마시고 양담배를 피워야만 멋져 보일 때였다. 실제로 박인환 시인은 죠니워커란 양주를 즐겨 마셨고 럭키 스트라이커란 양담배만 피웠다고 한다.
필자의 여고 때는 이시에 빠져들지 않으면 감성이 무디다는 소릴 들었다. 왜 가을 날 이 시를 읊으면서 눈물 흘리며 멜랑꼴리에 젖어 들었던 걸까. 지금도 그 의미를 다 헤아리지 못하지만 그때는 막연한 슬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 같은 감정이었지만 그래도 그저 좋았던 것 같다. 이 시를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내 격이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