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죽음의 법률적 정의3
존엄사(尊嚴死)
사람은 태어나게 할 자유는 있으나 태어날 자유는 없다. 그러나 태어난 이상은 인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헌법 제10조의 규정이다. 인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인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죽을 자유와 권리가 있을까?
생의 마지막 단계인 죽음에 임박하여 자연의 섭리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필요 없는 기계장치에 의하여 삶을 계속하는 것이 과연 인간답고 품위 있는 일일까? 존엄사(尊嚴死) 또는 자연사(自然死)의 문제이다.
존엄사란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와 가치를 지키면서 죽는 것을 말한다. 현대 의학상 최선의 치료를 다하였음에도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이다. 인공호흡기나 심폐소생술 등으로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불과하다. 이를 중단하고 자연적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존엄사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존엄사를 인정한 것은 2009년 이른바 ‘김 할머니 사건’이다. 식물인간인 된 김 할머니의 자녀들이 인공호흡기 등 연명치료의 중단을 요구하였다. 병원 주치의 등이 이 요청을 거부하자 자녀들이 재판을 청구했다.
대법원이 연명치료 장치 제거 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질병의 호전을 포기한 상태에서 현 상태만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루어지는 연명치료는 무의미한 신체침해 행위로서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친다는 것이었다. 환자의 자기결정권 즉 죽을 권리를 인정한 판례이기도 하다. 김 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뗀 뒤 튜브로 영양을 제공받으면서 202일 더 생존하다가 사망했다.
미국에서는 1976년 ‘카렌 퀸란(Karen Quinlan) 사건’이 첫 사례이다. 21세 여성 카렌은 정맥 주사와 산소 호흡기로 연명하는 지속적 식물 상태가 되었다. 부모는 의사의 판단과 본당 신부의 신학적 해석에 따라 품위와 존엄 속에 죽을 수 있도록 산소 호흡기를 제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담당 의사가 이를 거절하자 재판을 청구했다.
처음에는 산소호흡기 제거는 명백한 살인 행위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 후 뉴저지(New Jersey) 주 대법원은 의사와 병원 당국이 찬성한다면 산소 호흡기를 제거해도 좋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녀는 산소 호흡기를 제거한 후 9년간을 더 생존하다가 감염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또한 1990년 ‘낸시 크루잔((Nancy Cruzan) 사건’이 있다. 식물인간이 된 낸시의 부모가 병원에 급식 튜브에 의한 영양 공급의 중단을 요청했다. 병원은 법원의 결정 없이는 불가능하다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부모는 원치 아니하는 의료 장치에 의해 살아가지 않을 권리가 있다면서 재판을 청구했다. 연방 대법원은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환자의 치료거부권과 죽을 권리를 헌법상의 기본권으로 처음 인정한 것이다. 그녀는 급식 튜브를 제거한 지 12일 만에 사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 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약칭 ‘연명의료결정법’, 속칭 ‘존엄사법’ 또는 ‘웰다잉법’)이 제정·시행되고 있다. 호스피스·완화의료(‘호스피스’로 약칭) 분야는 2017년 8월 4일부터, 연명의료 분야는 2018년 2월 4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호스피스((hospice)는 원래 종교 및 사회단체에서 운영하는 여행자 숙박소 및 빈민 행려병자 등을 위한 수용소 의미였다. 그러나 지금은 말기환자 또는 임종과정의 환자와 그 가족에게 정신적으로 평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돌보는 일 또는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통증과 증상의 완화를 위한 치료만 하고 항암치료와 같은 적극적인 치료는 중단한다. 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 등이 참여하는 심리사회적, 영적 도움 활동이다. 1967년 영국 런던 교외에 세워진 성(聖) 크리스토퍼(St. Christopher) 호스피스가 효시이다. 우리나라는 1978년 강릉 갈바니병원에서 처음 호스피스활동이 시작되었다.
호스피스 대상이 되는 질환은 ① 암 ② 후천성면역결핍증 ③ 만성 폐쇄성 호흡기질환 ④ 만성 간경화 등 네 가지이다.
호스피스 대상 환자가 호스피스를 이용하려는 경우에는 호스피스 이용동의서와 의사가 발급하는 의사소견서를 첨부하여 호스피스전문기관에 신청하여야 한다. 호스피스 제공 등의 업무를 하기 위하여 권역별호스피스센터가 설치되어 있다.
호스피스는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입원형 |
호스피스 독립병동에 입원한 환자에게 호스피스 서비스 제공 |
가정형 |
환자가정에 호스피스 팀이 방문하여 서비스 제공 |
자문형 |
일반 병동이나 외래에서 호스피스 팀이 서비스 제공 |
연명의료는 임종과정의 환자에게 치료효과 없이 임종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의학적 시술을 말한다. ① 심폐소생술 ② 혈액 투석 ③ 항암제 투여 ④ 인공호흡기 착용 등의 시슬 방법이 있다.
최근에는 이밖에 체외생명유지술(ECLS), 수혈. 혈압상승제 투여 및 담당의사가 유보·중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는 시술을 추가하였다.
담당의사는 환자의 의사가 중단 결정을 원하는 것이고, 환자의 의사에도 반하지 아니하는 경우에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이행할 수 있다.
환자의 의사 여부는 다음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① 의료기관에서 작성된 ‘연명의료계획서’가 있는 경우 |
② 환자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관리기관에 등록되어 있는 경우 |
③ 19세 이상인 환자가족 2명 이상의 일치하는 진술이 있는 경우 |
④ 이밖에 친권자의 의사표시 또는 일정한 가족 전원의 의사표시가 있는 경우 |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9세 이상의 사람이 사전에 연명의료에 관한 본인의 의사를 문서로 작성한 것이다. 존엄사에 대한 일종의 유언서이다. 그리고 죽을 권리와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 표시이다.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등록기관(94개 기관, 총 290개소, 대구는 2곳)에 등록한다. 2019년 1월 현재 총 10만 1천 773명이 등록되어 있다. 필요하면 등록증도 발급하고 있다.
1989년 히로히토 일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일본 국민들은 애도의 물결을 이루었다. 그러나 장례식이 끝난 후 큰 반전이 일어났다. 그가 췌장암으로 장기간 고통스러운 연명치료를 받아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그의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충격을 받았다. 그 때문에 존엄사를 선택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98년 고 최종현 SK그룹 전 회장은 폐암으로 죽기 전 유언을 남겼다. “의학적인 치료가 한계에 도달할 때 불필요한 치료를 중단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례도 화장하여 수목장으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존엄사와 수목장 증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출생과 삶과 생명은 신비하고 존엄하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소생 불가능한 환자의 생명을 오로지 기계적인 방법으로 연장시키는 행위가 생명존중일까? 자연스럽게 생을 마감하게 하는 것이 더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일까?
그 논쟁은 이제 후자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과학의 힘이 자연의 힘 내지 신의 영역을 이길 수는 없다. 인간답게 살다가 인간답게 죽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어차피 죽음은 오는 것이다. 죽음을 인지하고, 죽음을 인정해야 한다. 나아가 죽음을 순순히 인용(認容)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품위를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