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이... 강창파크골프장과 허윤범 회장
바야흐로 봄이다. 강창파크골프장에도 봄이 왔다. 봄은 봄이건만 예년의 봄이 아니다. 지금 파크골프장들이 잔디생육을 위한 휴장기라 하지만 강창파크골프장은 그런 휴장이 아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5월 개장을 앞두고 잡초를 뽑고 물을 주는 봉사자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올해는 왠지 조용하기만 하다.
강창파크골프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이곳에서 어르신들에게 파크골프를 전수해 온 대구파크골프시니어연맹 허윤범(76) 회장이다. 그는 구장에서 멀리 옮겨진 컨테이너 사무실에 앉아 창밖에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지나간 날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파크골프와의 만남
그는 노인회 대구시연합회 사무처장을 지내다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15년 퇴임했다. 그 당시 대구시생활체육회가 노인회에 파크골프채를 나눠 주었다. 허 회장은 노인들에게 채만 줄게 아니라 차라리 조금이라도 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작정 대구시파크골프협회를 찾아가 자신부터 먼저 파크골프를 배웠다. 그는 금새 파크골프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연로한 분들에게 이만한 운동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부터 그는 어르신들에게 파크골프를 보급하는 일에 헌신하기로 다짐했다.
대구노인회로부터 스크린 골프장을 기증받아 파크골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르신들은 좁은 공간에서 운동하는 걸 싫어했다. 어르신들을 모시고 넓은 구장으로 나가려 했으나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를 당했다. 파크골프채에 회원 스티커가 붙어있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공을 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러 대구 외곽 구석구석 안 찾아 다닌 곳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바로 이곳 강창교 옆 금호강변이다. 대구시장실과 달성군수실을 노크했다. 어르신들에게 파크골프를 가르치기 위해 하천 부지를 좀 사용하겠다고 하니 시장과 군수가 흔쾌히 승낙했다.
파크골프장 개척
설레는 마음으로 구장 만들기를 시작했다. 곳곳에 오물이 널려 있었다. 그야말로 개들의 놀이터였다. 팔을 걷어붙이고 개똥부터 치웠다.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하나 둘 뜻있는 분들이 합류하여 잡초를 뽑고 돌맹이를 주워내었다. 동호인들의 땀방울에 힘입어 차츰차츰 구장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17년 3월 12일, 드디어 감격적인 파크골프장 개장식을 가졌다. 오물이 뒤섞여 있던 금호강 둔치 풀밭이 마침내 파크골프를 즐기는 어르신들의 아지트로 변모했다. 불모지였던 곳이 시니어들의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굿샷! 야야야야... 환호성이 터지고 웃음꽃이 피어났다. 경로당에 앉아있던 어르신들도 공원을 배회하던 노인들도 하나 둘 이곳을 찾아왔다.
파크골프 교육과 구장 관리에 올인
허 회장은 마치 파크골프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남다른 열정과 사명감으로 어르신들에게 파크골프를 가르쳤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정성을 다하여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 주는 허 회장에게서 사람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입소문을 듣고 파크골프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지금까지 그를 거쳐간 동호인들이 무려 2천200여 명이며 아직까지도 강창구장에서 동호회를 구성하여 그와 함께하고 있는 회원들도 천 명이 넘는다.
무릎 아픈 사람이 파크골프를 치면서 정상적으로 걷게 되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주부가 파크골프장에 나오고부터 우울증이 사라졌다. 허 회장은 자신이 보급한 운동으로 행복을 되찾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큰 보람을 느꼈다.
재능 기부의 길이 줄곧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어르신들이 삐치고 싸우고 서로 말도 안하고 패가 갈리고, 그러다가 오지도 않고... 이 일에 뛰어든 걸 후회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해 보겠다고 큰소리 쳐놓았기에 중간에 집어치울 수가 없었다. 노인회에서 받은 은혜에 보답하리라 약속했던 초심을 쉽사리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회장으로 군림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앞장서서 발벗고 나섰다. 회장이 나서니 회원들도 앞을 다투어 서로 먼저 궂은 일을 하려고 했다. 허 회장이 밀짚모자를 쓰고 나가면 모두 따라 나섰다. 그가 예초기를 메고 손을 덜덜 떨고 있으면 예초기 잘 다루는 사람이 얼른 뛰어와 바통을 이어받았다.
누군가가 월요일마다 모여 잡초를 뽑자고 제안했다. 그때부터 월요일은 구장 관리하는 날이 되었다. 대구시에서 기본적으로 잔디 깎는 일은 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부족했다. 회원들의 손길이 필요했다. 돌을 줍고 망을 치고 쓰레기를 수거하고 잡초를 제거하고 잔디를 보식하고...
장마로 구장이 침수되었을 때는 부유물과 진흙을 걷어내고 물로 씻어내고... 마치 집을 나갔다 돌아온 탕자를 부둥켜 안고 다시 씻기고 새로 입히듯 만신창이가 된 구장을 새단장하고는 감격에 젖었던 일이 눈에 선하다.
행복플러스봉사클럽과 마을가꾸기봉사클럽은 어르신들을 케어하고 구장 주변 환경정화에도 힘썼다. 때로는 회원들이 주머니를 털었다. 어느 해 식목일엔 쥐똥나무를 구입하여 구장 둘레를 단장했다. 초기에 허 회장이 사비를 많이 썼기에 이후로는 회원들도 힘을 보탰다. 강창파크골프장은 나날이 아름다워졌고 회원들이 늘 가고싶은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찬란한 슬픔의 봄
강창파크골프장에서 일곱 번째 봄을 맞이하는 허 회장은 잔디가 파랗게 자라나는 구장을 바라보며 그동안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얼굴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지금 허 회장은 자신이 낳아 애지중지 기른 자식과도 같은 이 구장을 쳐다보면 가슴이 아리고 비통하다. 요즘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올해 초 설날이 다가올 때쯤 달성군청 공무원이 찾아왔다. 느닷없는 구장 폐쇄 통보였다. 허 회장은 허탈감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환경청으로부터 전국 무허가 또는 환경영향평가에 저촉되는 구장을 원상복구하라는 행정명령이 떨어졌는데 대구에서도 4개 구장이 이에 해당되었으며 강창구장도 거기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시설물과 설치물을 철거하고 다시 허가 신청 후 승인이 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황당하기 그지 없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깃대를 뽑고 홀컵을 파내고 홀표지판과 티박스를 철거했다.
위기를 기회로
허 회장은 이대로 주저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관계기관을 찾아가 부당함을 호소했다. 6년 전 대구시와 달성군에서 공식적으로 허락해 주었고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내왔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구장 바로 옆에는 콘크리트 바닥 농구장도 있고 공연장도 있고, 강둑을 따라 자전거길도 있는데 파크골프장 푸른 잔디밭이 무슨 죄란 말인가.
차 없는 노인들이 지하철을 타고 올 수 있는 유일한 파크골프장. 병원 신세 질 몸을 이끌고 이곳으로 나와 건강을 되찾은 어르신들. 날만 새면 찾아와 함께 부대끼며 서로를 위로하던 그들 마음의 고향을 이렇게 빼앗아 가도 된단 말인가.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도 자식을 여럿 낳아 갖은 고생을 다하며 이 나라를 세워온 국가 유공자나 다를 바 없는 어르신들을 이렇게 대해도 된단 말인가.
강창파크골프장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어르신들이 이곳을 지나가며 깃대도 없이 텅빈 구장을 바라보게 된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릴까? 강창파크골프장은 동호인들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리라. 금호강 둔치가 파란 잔디로 덮일 때쯤 강창파크골프장엔 다시 어르신들의 발걸음으로 활기를 되찾으리라.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동호인들은 마음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다행히도 강창구장은 1만 평방미터 이하로 환경영향평가에서 제외됨으로써 현재 구장 실사를 마치고 설계 중에 있으며 5월초 개장을 목표로 행정 절차를 진행중이라 한다.
아직 후반전이 남아 있다
파크골프로 시작된 허 회장의 인생3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후반전이 남아있다. 노노케어의 표상이 되고 있는 그의 마음은 늘 청년이다. 어떠한 고난이 닥칠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변화의 기회로 삼고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
다른 협회들은 모두 지역단위로 운영해 왔는데 허 회장만은 지역 제한 없이 시니어연맹이란 이름으로 어르신들에게 특화된 단체로 이끌어 왔다. 어르신을 섬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다 보니 늘 봉사자의 자세로 임했다. 파크골프장이 공만 치는 장소가 아니라 노인들의 사랑방 역할도 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지자체의 지원을 거의 받지 않고 자력으로 구장을 운영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구장을 돌보다 회원관리에는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회원님을 잘 모시겠습니다.” 이것은 허 회장의 새로운 모토이며 마지막 과제다. 이제는 구장관리보다 회원관리에 신경을 더 쓰겠다는 뜻이다. 텃세를 부리며 비회원들에게 회원가입을 강요할 게 아니라 회원이 되면 더 재미있고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주어 자발적으로 협회 속으로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허 회장의 지론이다.
비회원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고 이들에게 회원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행사들을 구상하고 있다.
'달성군파크골프협회 강정분회'로 다시 뛴다
새로운 목표는 체제의 변화를 요구했다.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본의 아니게 일단정지선에 선 허 회장은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중대한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이제 시니어연맹의 간판을 내리고 달성군협회로 들어가 ‘대구 달성군파크골프협회 강정분회’로 새 출발 한다는 것이다. 구장의 명칭도 다리 이름을 딴 ‘강창파크골프장’에서 마을 이름에 맞춘 ‘강정파크골프장’으로 바꾸기로 했다.
달성군협회로 들어가는 것은 지자체의 지원을 받기 위한 단순한 목적이 아니다. 허 회장은 미래의 파크골프는 낙동강 주변이 대세이며 금호강과 낙동강을 낀 달성군이 그 주역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는 이제 더 큰 대열에 합류하여 더욱 역동적인 프로젝트를 펼쳐 나가고자 한다.
그는 대구 달성군을 파크골프의 ‘메카 안에서의 메카’로 만드는 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대구가 파크골프의 메카라면 달성군은 메카 안의 메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강정분회가 좀 더 열심히 뛰어 타 구장의 모범이 되고 싶은 것이다.
궁산을 낀 금호강 물줄기는 예나 다름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허 회장의 마음도 강물처럼 변함이 없다. 꿈꾸는 파크골프 선생님 허윤범 회장은 아름다운 이들과의 재회를 기다리며 오늘도 강정의 푸른 잔디 위를 응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