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29)
피해자가 피의자로 둔갑하는 세상에 공직에 몸담은 사람의 한마디는 무한한 힘을 가졌다는 진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차림으로 보아서는 그 흔한 사잣밥만 같다. 하지만 사잣밥치고는 더없이 푸짐하여 정갈하다 다시 보니 이목구비가 너의 아비를 빼어다 다시 보는 듯 조목조목 눈에 훤하구나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라고 그리 안 봤는데 끝순이가 제 서방 지키기로는 고단수네! 호호호~ 얌전 만 빼는 것보다는 백번도 났구먼! 뭘 그래요! 앞으로 서방님 하나는 석가모니불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처럼 잘 지키겠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끝순이가 숨은 열녀야! 열녀! 말로만 듣던 열녀가 멀리 있는 줄 알았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찾을 것 없이 코앞에 있었네!” 파안대소다. 동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는 달리 생각지도 못한 돌발상황을 맞아 한층 무안해진 할머니다. 당장에 얼굴이 술에 취한 듯 달아올라 벌겋다.
“시집을 가서도 철딱서니 없는 이것아! 설마하니 생으로 내 서방을 잡을까 봐서 그러니! 다 장난이지 장난!” 나무라지만 이미 게임은 끝난 상태다. 달리 수습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다시 상을 손보고 안주를 데우고 술주전자를 들어서 흥을 돋운다.
“허~ 허! 그것참!” 낭패한 표정에 실없는 웃음의 마을 장정들도 그리 오래 끌고 싶지는 않았다. 김 서방, 고모부로 말하자면 현재 미관말직이거나 말거나 공직에 몸을 담고 있다. 괜히 우쭐하는 기분에 밉보였다가는 훗날이 재미없을 거라 여겼다. 이 기회에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 훗날 송사가 있을 시 굽신굽신 부탁이라도 해야지만 수월하리라 여긴 때문이다. 조서를 꾸밀 적에 실수인 듯 한쪽 눈을 질끈 감으면 피의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피의자로 둔갑하는 세상에 공직에 몸담은 사람의 한마디는 무한한 힘을 가졌다는 진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법은 멀어 주먹질 대신에, 매타작 대신에 돼지고기가 걸쭉한 국밥 한 그릇이 공으로 생긴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터득한 터였다. 꿩을 밀렵한 힘 있는 자보다 핫바지 같은 인간이 모르고 손에 들면 그 죄를 옴팡(‘죄다’의 방언) 덮어쓴다는 것이 진리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괜한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가 않은 때문이기도 했다.
무당의 예언대로 혼례 날은 하루 내내 봄을 예찬하여 부드러운 햇살이 대지 위로 살포시 내려앉아 우후죽순으로 솟는 연두색의 여린 새싹을 고사리 손길로 살랑살랑 어루만졌고, 하늘은 더없이 높아 청명했다. 무당이 굳이 날이 맑아서 길일이라 예언했을까? 알 수는 없지만 개밥바라기(저녁에 서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을 달리 이르는 말)가 유난히 빛났던 초저녁이었다. 밤을 맞아서는 별들이 부지기수로 떨어져 내렸다. 함박눈처럼 잿빛으로 색이 바래는 초가지붕을 금구슬 은구슬로 자분자분 내려앉아 덮었다. 따뜻한 온기의 아랫목은 비단 금침이 밤새 포근히 감싸 축복이다. 그렇게 달콤한 밤이 지난 다음 날로 고모는 정든 할머니의 품을 떠나 시집으로 들어갔다. 가마 안 깊숙이 쑥과 솜을 채운 요강을 밀어 넣는 할머니가 애절한 눈빛으로 마지막 당부다.
“끝순아! 내 사랑하는 딸아! 다시 말하지만 너의 목숨줄은 네 것이 아니니라! 관세음보살님이 이 생애에 있어서 아직은 할 일이 있다 여겨 덤으로 주신 것으로 함부로 하면 아니 되느니라! 그분의 높은 뜻을 받들어 그글피 저녁에 당부했다시피 훗날에는 누가 뭐라든 공덕을 베풀고 살아라! 그리고 이 길로 시집으로 들어가면 나 죽었네, 엎어져서 일어나지 말아라! 그렇게 죽은 듯 한평생을 살아라!” 눈물을 훌쩍인다. 두 손을 부서질 듯 잡아다 놓으며 이별이다.
할머니는 고모가 탄 가마가 물 찬 제비처럼 날렵하게 재를 넘는 것으로 이승에서 고모랑은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후일 관속에 누워 고모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순리에 따라 자연으로 돌아가라 생각했다. 새벽녘 풀잎에 맺혀다가 아침 햇살에 소리 없이 사라지는 꿈같은 인생길에 해야 할 일 중 마지막 숙제를 야무지게 매듭지었다고 생각했다. 저승에 들면 떳떳하게 할아버지를 찾아 투정 아닌 투정으로 산 밤을 구워 먹으리란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하기에는 아직은 할 일이 남은 듯 할머니가 마당 가장자리에다 개다리소반 펼쳐 조촐하게 상을 차린다.
서산을 넘어가는 봄 햇살이 설핀 깃든 집안은 파장을 맞은 장터만 같아 을씨년스럽기만 한데 상을 어루만지는 할머니의 손길이 조심스럽다.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만 사그락사그락, 가만가만 정적을 가르는 속에 동네 아낙네들과 하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직후라 그런지 앞마당은 고즈넉하기 그지없다. 철 지난 바닷가처럼 쓸쓸하여 적막강산이다. 억겁으로 흘러드는 파도처럼 때때로 얼굴색을 바꾼 봄바람이 흘러들어 빈 소라껍데기, 귓전에 억지를 부려 둥지를 틀어서는 들어앉는다. 공짜가 어디 있냐고 남녘의 아기자기한 꽃소식을 끝없이 속인다. 무심한 표정에 간지럽다며 간간이 귀를 파는 할머니의 몸가짐으로 짐작하건대 무료하고 허허로운 시간을 메우려는 모양새는 분명 아니었다. 두세 번에 걸쳐 옷매무새를 살피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러운 행동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큰일을 앞둔 듯 걸음걸이조차 치맛단을 들어서 사뿐사뿐한 것이 전에 없이 조신해 보인다.
이윽고 촛불을 밝혀 할머니가 마주한 상위에는 밥 한 공기에 물 한 그릇, 시접(匙楪)으로는 수저 한 벌이 가지런하고, 붉은 대추 몇 알, 토실토실한 생밤 몇 알, 볶은 낙화생(落花生:땅콩) 조금, 사과 반쪽, 배 반쪽, 명태 지짐이 조금, 돼지고기 한 점, 떡 한 쪼가리, 술 한잔 등, 차림으로 보아서는 그 흔한 사잣밥만 같다. 하지만 사잣밥치고는 더없이 푸짐하여 정갈하다,
상 앞으로 초석(草席)을 펼쳐 강신례(降神禮)로 나부죽이 재배 후 고요히 앉은 할머니가 기계처럼 고개를 상하로 주억거린다. 그 옆으로는 백구가 평소처럼 지키고 앉아서는 앞산 허리께로 시선을 무람없이 고정이다. 중간중간 할머니가 머리를 조아리면 눈치껏 반 박자 굼뜬 백구가 어설프게 흉내 질이다. 할머니가 지문이 닳아 없어지라 비비고 또 손을 비벼갈 때면 백구는 앞발을 덜렁 들어서 허공에다 휘휘 내젓는다. 그 모습을 용하다며 곁눈으로 일별한 할머니가 중얼거리며 외는 주문이 구구절절하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께 비나이다. 칠성님께 비나이다. 동방을 관장하는 지국천왕님께 비나이다. 서방을 관장하는 광목천왕님께 비나이다. 남방을 관장하는 증장천왕님께 비나이다. 북방을 관장하는 다문천왕님께 빌고 또 비나이다. 오늘에 들어 이 늙은이가 이렇듯 정성으로 주과포(酒果脯)를 진설하고 천상천하의 신들을 모셔와 간청 들이는 까닭은 금년 삼월 초 열흘날을 맞아 애물단지같이 미욱한 이년의 딸년이 눈물 콧물로 맵다는 시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무쪼록 딸년의 고단한 시집살이를 어여삐 여기셔서 어려운 일이 닥치면 꽃을 본 듯 어루만져 주시고, 혹여 모르는 가운데 죄라도 지을라치면 자식인 듯 훈계하여 보듬어 주옵소서! 이술 한잔을 맛나게 받으시고 부디 알뜰살뜰 보살펴 주시옵소서! 지난 허물일랑은 이 어미에게 모두 물으시고, 이 어미를 벌하시어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애절하게 빌고는 한 잔술을 상 뒤에다 세 번에 나누어서 붓는다. 다시 한잔을 잔이 넘치게 따라 상위에 올려놓고는
“너희들이로구나! 그간 하루처럼 가슴앓이로 그리웠는데 진즉에 그리로 와 있었구나? 무정도 하여라! 어미의 기별도 없이 어째 알고 왔느냐? 용하기는 한데 어떻게 어미 없는 모진 그 세월 속에 추위에 떨지는 않았느냐? 굶주리진 않았느냐? 오늘 이렇게 생시인 듯 꿈인 듯 만나고 보니 반갑기는 한이 없다만은 언제부턴가 이 어미의 눈이 아름아름하더니 그저 형체만 아름아름 하구나! 한데 다시 보니 이목구비가 너의 아비를 빼어다 다시 보는 듯 조목조목 눈에 훤하구나! 그렇더라도 너무 오랜만이라 얼굴도 데면데면한 내 아들딸들 사 남매야~ 오늘에서야 너희들의 철부지 막내 여동생이 그 험하다는 시집으로 들어갔구나! 너희들은 이승에서 못 누려보는 호강이라 여겨 부러워 말아라! 시샘도 말아라! 악한 마음은 더더욱 아니 된다. 그러나 어쩌겠나! 이것이 전생의 업을 대신한 이승의 짧은 인연이라 여겨 부디 이 어미를 원망하지 말아라! 짧은 생을 한탄 말고 온갖 병치레 끝에 겨우겨우 목술 줄을 부지한 네 동생일랑은 어여삐 여겨 언제 어느 때고 어려움이 닥치걸랑 힘이 되어 주려무나! 따뜻한 손길로 잡아주려무나! 모진 이기심만 같다만은 그것만이 이 어미가 너희들에게 이승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바라는 간절한 원이구나!” 한숨 짓고는 높은 하늘을 우러러 한참을 넋을 놓는다. 소슬바람이 불어 귀밑머리를 스쳐 지날 때 문득 정신을 차려 파리를 좇는 형상으로 상위로 팔을 휘둘러서는 다시 손을 비벼 고갯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