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40)
당장 절교해! 쎄고도 쎈게 세상 여잔데 나도 그런 코가 센 가스나는 필요 없다 너~ 이년!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들락날락 축내면 매타작으로 죽여 버릴란게! 봄 꿈에 취한 몽롱한 눈길이 하늘가서 무람없이 뭉게구름을 좇는다
몇 날 며칠을 허공을 헤매는 듯 무기력함에 빠졌다. 허무주의가 온몸을 휘감아 끝없는 나락으로 이끈다. 먹는 것에도 심드렁하고, 책을 펴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만사가 귀찮아 게으름으로 일관이다. 매일같이 턱밑서 쫑알거릴 때는 성가시고 귀찮다는 생각에 때때로 멀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헤어졌다고 생각하니 지난날이 따사로운 봄날이라 실감이다. 급기야 밥상을 앞에다 두고 깨작거리는 나를 보고 그동안 참고 참았다는 듯 어머니가 한마디다.
“철수 너 벌써 며칠째를 이러고 있는 거니? 이 어만 복장 뒤집는 것도 아니고 밥 먹는 그 꼬라지가 다 뭣꼬! 그나마 있는 복도 다 나간다만 푹푹 안 퍼서 먹을래!”
“...!”
“들려오는 소문에 너 영희랑 싸워서 틀어 졌다며? 그래서 밥도 안 먹고 멘지락하게 그러고 있는 거니! 하여간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쪼깨한(‘조그마하다’의 방언) 것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진즉부터 연애질에 아주 꼴값을 떨어요!” 어머니 말에 아버지는 쓰다 달다는 말없이 곁눈질에 조용한 미소다.
“그리 풀이 죽어있지 말고 얼른 밥이나 많이 먹어라!” 재촉 중에 품을 뒤적거려서는
“어째 둘이 똑같이 쌍 나대는지! 별꼴이 반쪽이야 진짜! 그리고 야~ 이놈아! 불알 찬 사내자식이라면 그렇게 사랑 병이 들어 끙끙 앓지만 말고 죽이 되든 밥이 되는 용기를 내야 할 것이 아니냐! 그기 머스마지! 알랑방귀를 뀌든, 업어주던 어쨌든 토라진 여자, 영희 마음을 풀 줄도 알아야지! 그래서 내 보탬이 되라고, 이 어미가 옛다. 이것이나 영희 갖다 줘봐라! 백발백중 풀릴 거다. 그래도 정 안 되면 당장 절교해! 쎄고도 쎈게 세상 여잔데 나도 그런 코가 센 가스나는 필요 없다” 하는 어머니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눈깔사탕 세 알을 슬그머니 방바닥에 내려놓는다.
“내 영희엄마에게 물어서 알아보니까 영희! 고 맹랑한 것이 눈깔사탕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더라!” 빙그레 웃는다.
그날 이후로 어머니 말을 철석으로 눈깔사탕 세 알 중 두 알을 호주머니에 넣어 호시탐탐 영희를 노리고 있었다. 그 염원 통했을까? 딱 삼 일이 지난날 오전 나절에 고샅에서 영희를 만났다. 어머니의 심부름 차 영희네 집으로 가는 길에 운명처럼 마주했다. 서먹서먹한 분위기는 여전하여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궈 땅을 내려다보며
“저기 저~ 영희야!” 어렵게 말을 붙이는데 눈을 깜박이며 의외로 경쾌하게 대꾸다.
“응~ 왜? 왜 그래 오~ 오~ 빠야! 나 불렀어?”
“응~ 나는 그게~ 그러니까?” 우물쭈물 망설이는데 가만 표정을 살피던 영희가 피식 고소를 짓더니 입을 삐죽이 내밀다가는
“나~ 바빠! 왜? 괜히 심부름가는 사람 불러놓고는, 실없이 할 말 없으면 나 간다. 그럼 가?” 쌩하니 몸을 돌리는데 다급해진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으로 손을 뻗어 막무가내
“응~ 저기 영희야! 이~ 이거! 이거 너 주려고! 네가 좋아 한데서!”
“이게 다 먼데?”
“응~ 사~ 사탕이라고!”
“어머나 그러네! 눈깔사탕이네! 이거 어디서 났어! 저번 날 우리 엄마가 많이 먹으면 이빨 상해!” 다락방에다 꼭꼭 숨겨놓으며
“미구(‘여우’의 방언)같은 너~ 이년!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들락날락 축내면 매타작으로 죽여 버릴란게 그리 알고 알아서 조심해! 으름장으로 간수 하던 사탕이랑 똑같은 것이네! 이 맛있는 것을 어째서 네게, 오빠가 안 먹고 진짜로 나 주는 거야!”
“응~”
“고마워 오빠! 나 사실은 오빠네 집으로 어머니 심부름가는데 얼른 마치고 오후에 놀러 갈게! 그래도 되지?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응~ 오빠야!”
“으~ 응~!”
“알았어! 얼른 밥만 먹고 빨리 갈게!” 환하게 볼우물을 지으며 달랑달랑 뛰어가는 모습에서 언제 그런 날이 있었나 싶다. 그때만큼 어머니께 감사하고 고마운 적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 실수 연발일까?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모양, 어쩌다가 영희가 웃을 때는 안보는 척 곁눈질로 슬쩍슬쩍 흘겨보는 것으로 만족이다. 그런 나의 어설픈 행동에도 동티가 났을까? 어느새 눈치챈 영희가 쫑알거려 미소다.
“히~ 철수~ 아니 오빠야! 오빠는 엉큼하게 또 도둑고양이처럼 안 보는 척 슬그머니 또 봤지” 방그레 장난기를 담아서 커다란 눈을 치켜뜬다. 그럴 때면 영문을 모르는 나는 가슴이 ‘덜컹’ 심연 깊숙한 곳으로 내려앉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고 화답인 듯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잇몸이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는다. 노골적으로 방실거려 볼우물을 짓는다.
“보면 안 돼” 하면서도 보란 듯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때마다 가슴 저 밑으로부터 은연중 치솟는 설레면서도 이상야릇한 감정을 애써 숨긴다. 하지만 세상에는 영원한 비밀이란 없다는 말이 진실로 사실이었을까? 아니면 그런 내 마음을 도둑질이라도 당했을까?
그날은 무한정의 봄볕이 실비단으로 드리워져 대지 위에서 화사했다. 연분홍 봄꽃이 난분분, 창공으로 날아올라 명서풍에 몸을 싣는 모습에 구름 위를 걷는 듯 아련하게 취한 이상한 날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마저 동네잔치로 집을 비워 적막강산 같은 날이다. 정남향의 툇마루에 올라앉았는데 봄 꿈에 취한 몽롱한 눈길이 하늘가서 무람없이 뭉게구름을 좇는다. 눈앞으로 무지갯빛 아지랑이가 아른하게 핀다는 느낌이다. 툇마루 가득하게 꽃잎이 소복하게 쌓인다는 느낌인데 언제 어느 때 왔을까? 실눈 사이를 헤집어서 풀잎에 맺힌 이슬 위를 바람으로 날아서 왔을까? 봄볕 아래 사금파리 조각들이 조각조각 부서지는 속을 아장아장 걸어서 왔을까? 아니면 진작부터 여기에 와 있었을까? 환영인 듯 영희가 뽀얀 얼굴로 빤히 들여다보며 웃고 있다.
지금껏 봄 꿈에 취해 고요하던 가슴이 세찬 물결로 무람없이 요동인데 호수처럼 맑고 고운 눈망울이 참으로 크다는 느낌이다. 아니 지척에 이르러서 자세히 보니 눈이 크다기보다 얼굴이 손바닥 하나 크기로 작아 보인다. 저 작은 얼굴 위로 그린 듯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질서정연하여 현기증으로 아찔하다. 유명화가가 정성으로 그린 듯 초승달로 날렵한 아미를 거처 미끄러운 미간에서 흘러내린 눈길이 다부진 인중에서 머무는데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문득 손을 뻗고 싶다는 욕망이 은연중 불쑥 치솟는다. 하지만 지난번과 같은 실수는 안 된다며 멍청하게 바라다보는데 도톰한 입술이 달싹달싹 말을 붙여 온다는 느낌이다.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귓전에서 문득 바보가 된 기분이다.
“응~ 저기 저~ 오~ 오빠야! 있잖아~ 지금부터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 알았지! 알았으면 고개를 끄덕거려봐!”
“응”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러면 오~ 오빠야 눈 한번 감아봐! 내가 뜨라고 할 때까지는 절대 안 돼! 알았지!” 은근하게 속닥거려 명령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