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동토에서 꽃피운 기적, 서상진 건축사

가족 건축사 원팀 트레이드마크 건축 꿈꾸다

2024-07-01     유무근 기자

1등 작품만 수주 계약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지방자치제에서 발주한 아파트 현상 설계 공모전에서 번번이 낙방 되다가 천신만고 노력으로 5번 만에 1등을 획득하고 칠곡군 왜관읍에서 ‘시티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까지 입지전적인 서상진 대표를 만나 건축에 대한 흐름과 그의 삶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1997년에 IMF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건축설계사무소마다 직원들 월급을 못 주는 상황 발생 때, 설계사 경력 5년이 넘어 시험을 치를 수 있었어요. 업무를 하면서 시험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한 해 동안 두문불출해서 일차에 자격증을 땄습니다. 바로 개업해서 계약을 체결할 인프라 구성도 안 되고 두려움이 있어, 2000년도에 대학동아리 선배와 같이 대구에서 사무실을 공동으로 개업했다. 실질적으로 현상설계 쪽으로 많이 했어요. 두 달에 한두 건 정도 10여 건의 성과가 있었어요.

대학교 진학할 때 토목과 건축을 견주다가 건축과를 택했죠. 건축 디자인하는 동아리가 교내에 있었어요. 선배들과 어울려 지도교수님 조언 받으면서 DAS라는 Design Architecture Study Group 하는 동아리 가입으로 건축설계사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청송에서 3남 1녀 둘째로 태어나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교 진학에 맞추어 대구 평리초등학교로 전학, 평리중학교를 거쳐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영남대학교 건축과 졸업하고 동대(同大)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직장으로 스카우트 되어 현상 설계를 주로 하는 건축 사무소를 두루 거쳤다. 그의 구상은 달랐다. 새 직장에서 현상 설계하자는 나의 제의를 받아 아파트 설계 팀장을 맡게 되었다. 대구광역시에서 발주하는 현상 설계공모가 있어 마감 일자가 임박하여 밤을 새우면서 출품하였다. 이번에 출품은 내심 기대가 컷으나 또 2등에 그쳤다. 사실 2등과 1등은 천당과 지옥 차이다. 1등만 승자로 살아 남고 2. 3등은 패잔병으로 관급 공사 수주는 아예 없었다. 전쟁터 같았다. 경제난으로 사측에서는 직원들이 눈엣가시랄까, 필요악인 샘이었다.

- 현상설계 현황과 공모전에 얽힌 사연은?

▶ 입찰방식이 아니라 각자 설계해 와서 심사 후 제일 좋은 설계도에 1등을 주는 식으로 관에서 공모를 많이 합니다. 거기서 1등을 해야 계약으로 연속된 일거리가 주어지는 시스템이죠. 당시에 울산 쪽에 학교 공모가 자주 나왔어요. 초등학교 신설 공모도 많이 나왔죠, 대구 지역 같은 경우에는 동사무소 신축 설계공모가 꽤 나왔었지요.

합동 경영이 어려워서 단독으로 사무실을 구미시 오태동으로 옮겨 2년간 열정을 쏟았으나, 힘이 더 들었었죠. 또 정리하고 대구로 돌아와 다시 직원으로 돌아와 재기의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외환위기 여파로 건축 시장은 실행되는 것들이 없는 상태였거든요,

마침 현장 답사 갔던 곳에는 ‘대구 도시개발공사’ 다사읍 죽곡 청아람 아파트 1단지(1316세대)와 2단지(716세대)가 발표되었는데, 날짜가 녹록하지 않았지만, 여러 차례 낙방한 경험으로 25시간처럼 주야로 몰입하여 그걸 현상 설계를 하여 응모한 작품 그것이 1등에 선정되었습니다.

설계비 1단지당 14억 원이었는데 당선되니 공사를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작업을 1년 6개월 정도 수행했습니다. 인센티브도 꽤 받았습니다.

소속 회사로부터 받은 두둑한 사례금으로 외환위기 때 빚진 것 빚도 갚고, 자동차도 바꾸고 나머지는 아내를 주었죠. 오랜만에 받는 통장이라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더군요.

모든 게 아내 헌신으로 고마움을 느낍니다.

청아람 작업이 마칠 때쯤, 오태동 사무실 때에 선배 건축사가, 진행하고 있는 아파트 물량이 많아, 밀려 있는데, 두 개를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밥상에 수저까지 얹어 주는 것 같은 배려에 왜관으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 건축설계 경쟁력이랄까, 시장 흐름은 어떻습니까?

아파트 건축설계 부분이 인생 진로에 큰 도움이 된 셈입니다. 외환위기로 쓰러져 가던 내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니까요.

왜관에 와서 주로 하는 업무가 관공서 일을 주로 맡아 합니다 관공서 알은 요율에 따라 설계비가 산정되죠. 어느 정도 합리적 가격을 받고 있습니다만, 일반업무에서는 요율은 보장해 주는 그런 게 없는 단점이 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의 설계비나 평당 단가 인식을 하고 있으니까 그게 힘든 부분이고 책정된 단가 이런 부분은 떴다 방식으로 덤핑 치는 업체도 있어 제 일을 뺏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도덕에 위배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히려 손해나는 수주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 건축사가 되었어도 어려웠던 적이 있었나요?

▶ 외환위기 끝날 무렵 구미에 개업했다가 일이 꼬였던 적이 있었죠. 결혼 후 어린 자식도 있는데 집에 생활비도 갖다줄 수 없는 상황이라, 어르신께 신세를 지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1997년 그때가 제일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가족은 1남 2녀 딸 둘 아들 하나가 있습니다. 큰 딸은 28살인데요, 대학교 갈 때 제가 조금 강력하게 추천해서 건축학과를 보냈어요. 졸업 후 현재는 우리 사무실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사실 집사람은 제가 살아오면서 굵직한 결정이 필요할 때는 집사람과 상의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자문해 주는 게 저에게는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 종교는 달라도 한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갓바위 정상을 아내에게 등 떠밀리며 몇 번이나 올랐어요.

과체중으로 십 년 동안 안 올라갔던 갓바위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숨만 간신히 고르면서 100kg이 훨씬 넘는 해비급 체중으로 정상 도전을 몇 차례나 올랐었죠. 잠시 쉬는가 했는데 아내는 물 한 그릇 급하게 마시고 연신 허리 굽혀 108배를 올린다 물에서 방금 건져낸 듯이 땀이 구슬처럼 흐르는 아내를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했어요.

정성이 하늘에 닿은 듯, 건축사 시험은 단번에 합격하고 실기까지 통과했습니다. 아내의 정성 어린 염원이 감천 되었으리라 믿어졌습니다. 보람을 묻는다면 아내를 잘 잘 만났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한 가지 더는 큰딸이 건축사로서 한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후계를 맡길 수 있다는 것이 큰 보람으로 느낍니다.

건축사

 

-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지요?

▶ 일반적으로는 나만의 건축을 만들어 보고 싶은 게 계획이고요,

제가 설계한 건물이 ‘서상진이 설계한 건물이다’라는 트레이드마크 화를 꿈꾸고 있습니다. 건축설계로서 지역 내 명소 건축물 하나 남기고 싶은 노력은 저만의 꿈만은 아니겠지요.

닮고 싶은 롤모델 인물, 건축 쪽으로는 일본의 건축가 ‘안도 타다오’ 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의 설계 건물을 보기 위해서 일본도 가고, 국내에 설계된 건물도 보러 갔습니다. 갈 때마다 놀라운 부분들이 있어 전율을 느껴지기도 합니다.

국내 서상진이 설계한 독특한 트레이드마크 건축물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