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87)
앞뒤가 꽉 막힌 벽창호도 아니고 덕배는 거두절미, 일언지하다 마지막에 이르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도 아니고 습관처럼 주먹을 앞세웠다 삶이 아름답지는 않지만, 삶을 아름답게 바라보며 살아갈 용기가 생겨나는 기분이다
“저~ 저~ 저기~ 저~ 지~ 시방 호~ 혼인~ 신고~ 라 그랬시유! 그~ 그 말이 차~ 참말이여유!” 의문으로 반문인데 덕배가 선뜻 대답하지 못해 ‘컥컥’거린다. 그제야 팔에서 힘을 푸는 복녀는
“저기~ 저 나~ 난~” 감정이 격해진 복녀가 다음 말을 잊지 못한다. 절로 목이 멘 탓인지 입안이 바싹바싹 마른다는 기분이다. 사실 복녀가 보따리를 싸는 이유 중에 혼인신고도 하나의 큰 이유였다. 그간 복녀는 수차례에 걸쳐 덕배의 기분을 살펴 가며 혼인신고를 요구하여 졸랐다. 일삼아 입에 맞는 반찬에다 안주를 만들었다. 상머리에 앉아 술병을 들어 코맹맹이 소리로 없는 애교에 갖은 아양도 떨었건만 벽에다 이야기라도 했을까? 그때마다 앞뒤가 꽉 막힌 벽창호도 아니고 덕배는 거두절미, 일언지하로 복녀의 입을 막았다.
“안돼!” 눈을 부라려서 윽박질렀다. 그 기세에 풀이 죽은 복녀가 세상을 등져 서럽게 훌쩍인다. 물 한 그릇 떠놓고 천지신명에 고하든, 초례청을 거둬 초야를 치른 부부라면 당연한 일인데! 이럴 거라면 어째서 옆구리를 찔렀나 싶다. 뭇사람들이 하기 좋은 말로 남녀가 한 이불을 덮어 살을 섞으면 없는 정도 샘물 솟듯 솟는다는데 우리 부부는 돌연변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저 꽃을 보면 빈말이라도 당신을 본 듯 예쁘다 꺾어주고, 미운 투정에는 응석으로 알아 사랑으로 감싸주고, 염천이 내려놓는 이마로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은 옷소매로 씻어주고, 엄동설한에는 시린 손이 차가워 가슴이 아리다며 입김으로 ‘호호’ 녹여가며 그리 살면 되는데!
내가 언제 같이 살아 달라고 애원이라도 했었나! 남사당패가 해체될 무렵 복녀는 첫정을 나눈 덕배를 염두에 두질 않았다. 이래저래 거의 포기 상태였다. 마음이야 늘 독야청청이라지만 몸은 이미 아니다. 비록 노류장화(路柳牆花:누구든지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이라는 뜻으로, 몸을 파는 여자를 이르는 말)는 아닐지라도 어차피 뭇사람들이 손가락질로 천시하는 예인(藝人)의 길로 들어선 상태다. 남들이 어떻게 보건 간에 자신은 속일 수가 없어 이 사내 저 사내가 거쳐 간 뒤다. 이는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 까닭에 야무지게 돈이나 벌어서 후일을 기약하자 마음먹고 있었다. 천형에 곰배팔이(팔이 꼬부라져 붙어 펴지 못하거나 팔뚝이 없는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만 아니라면, 이런저런 조건을 떠나 사지만 멀쩡하다면, 인연이 닿는 어느 사내와 부부 연을 맺어 남은 생을 의지하며 살리라 생각했다.
그런 자신의 처지를 십분 헤아린 복녀는 안방마님에 부귀영화는 언감생심, 감히 꿈을 꾼다거나 바란 적이 없었다. 그저 그렇게 저렇게 마음을 나누며 살고 싶었다. 이승으로 올 때 두 주먹 불끈 쥐고 왔다지만 인생이 뭐 별건가? 따뜻하게 곁을 내주고, 딸이든 아들이든 하늘이 점지해준 아이를 함께 키우며 어깨를 토닥여서 같을 방향을 나란히 바라보며 또박또박 걸어가면 되는데! 무서리가 내린 듯 새치 희끗희끗한 머리에 날아앉은 지푸라기는 마주 보며 떼어주고, 조선간장 한 종지를 놓던, 나물 소찬에 죽이든 밥이든 맛나다며 나란히 먹고, 이랑 이랑을 건너가며 함께 일하다가 고된 쉼을 위로하고, 과거는 과거대로 묻어 두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사랑하며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그 작은 소망마저도 내게는 과하여 분에 넘쳤단 말인가? 행복에 겨운 희망이었단 말인가? 왜 나는 가재걸음처럼 나날이 뒷걸음질로 시궁창으로 처박히는 기분일까? 이렇게 남보다 못한 원수처럼 살 바에는 떠나게 그냥 놓아두지 어쩌자고 손목은 잡아서 이끌었을까? 한숨이 아깝게 덕배가 저승사자로 그저 원망스럽다. 아린 가슴을 부여잡아서는 하늘을 우러러 하염없는 눈물이다.
하기야 덕배 저놈은 천성이 개차반에 빌어먹을 놈으로 그렇다 치더라도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은 고통이고, 고해의 바다라더니 세상을 들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이다.
철학자 니체는 아모르 파티(Amor Fati:운명애, 운명에 대한 사랑)라며 운명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라 했다. 삶이 아름답지는 않지만, 인간이라면 삶의 고통을 아름답게,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라고 했다. 한데 아파도 너무 아파 생살을 도려내는 듯 고통스럽다. 가슴을 쥐어뜯는 고통으로 복녀가 생이 절망의 구렁텅이라며 옷고름을 꼬깃꼬깃 접어가며 눈물을 찍는데 지붕이 들썩하도록 덕배가 벼락같은 호통이다.
“야~ 이 화냥년아 뉘 집에 초상이라도 났다던? 죽었다던 어만 아반가 다시 죽기라도 했다던! 어디 여편네가 할 짓이 없어 방구석에 편등편등 들어앉아 청승맞게 질질 짜서 눈물이고~ 그나마 없는 복까지 싸잡아서 다 나간다만 얼른 안 그쳐! 그리고 그깐 그것이 다 뭐라꼬, 평생을 가도 한번 볼까 말까 한 조우쪼가리가 뭣에 중하다고!” 마음만 있으면 되지! 냉정하게 돌아앉아 담배부터 찾는다. 언성을 높이다가 마지막에 이르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도 아니고 습관처럼 주먹을 앞세웠다. 그런 날이면 복녀는 이승에 없는 부모님이 뼈에 사무치게 그리웠다. 사고무친으로 의지할 곳도, 마음을 위로받고자 찾아갈 곳도, 말 한마디를 붙여 하소연할 이 하나 없는 복녀가 홀로 서러워 장독대를 찾는다. 쪼그려 앉아 어깨를 들썩거리며 아버지 어머니를 입에 올린다. 오지랖이 흠뻑 젖도록 울고 또 운다. 붉은 봉숭아꽃 진 자리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서 생살이 저미도록 삶이 아프다.
문득 젖은 눈으로 올려다보는 하늘로 실없는 밤별이 부지기로 초롱초롱하다.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하나씩 갖는다는데! 저 많고 많은 별 속에 내 별은 어디에! 정말 있기는 하는 걸까? 그럼 내 아기의 별은? 귀뚜라미가 구슬피 울어 더 서러운 밤이 바람과 구름을 친구로 부윰한 새벽을 손짓하여 무심히 흐른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어 덕배의 옷자락을 맥없이 붙잡아 보는 복녀는 덕배 말대로 그깐 조우쪼가리라 해도 목숨 줄로 여겨 기어이 원했다. 설사 코를 풀고, 변소에 앉아 똥닦개로 쓰일지언정 세상에 당당하고 싶었다. 노래판이라 할지라도 기루에서 오다가다 만난 인연처럼 계모에 후실이라든지 첩이란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다는 바보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조선 제11대 중종 때 윤원형(문정왕후의 남동생)의 첩이었던 요녀(妖女) 정난정(鄭蘭貞)처럼 본처였던 김씨를 독살 후 떡하니 본처가 되는 것도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당연한 본부인 자리를 요사스러운 첩 년에게 맥없이 빼앗기는 따위는 죽는 이만 못하다 여겼다. 칼을 거꾸로 물고 죽었으면 죽었지 두 눈 시퍼렇게 뜨고는 어림없다 다짐이다. 그런 까닭에 덕배 말처럼 설사 평생을 들어서 한번 볼 수도, 또 그 흔해 빠진 종이 나부랭이라 할지라도 이름 석 자를 나라님이 인정하는 호적부에 부인이라 또박또박 올리고 싶었다. 뱃속 아기를 위해서라도 그것이 말로 어미로서 꼭 치려야 할 인생 일대의 중대사로 여기고 있었다. 설령 허울뿐인 빈껍데기로 살지언정 그조차도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장차 태어날 자식의 얼굴을 떳떳이 대하고, 낯짝 간지럽게 하늘을 우러러볼 수가 있단 말인가? 그조차도 못한다면 향후 단물이 빠지고 화무십일홍이라고 곧장 실증이 일터이고, 덕배로부터 마음이 멀어지리라! 미련 없이 버려지리라 여겨 밤잠을 설쳤다. 남들은 당연히 누리는 그 행복이 나에게만은 왜 이처럼 멀기만 할까? 뜬 눈으로 지센 밤이 어디 하루 이틀이든가?
게다가 근자에 들어서는 툭하면 감추고만 싶은 과거지사를 들먹여가며 매질이다. 그런데 꿈에도 그리던 혼인신고를 덕배 자신의 입으로 들먹거린다. 가슴이 벅차다. 평생을 들어 고통스러운 족쇄가 될지라도 한결같은 마음이다. 진짜로 부인이 되고 떳떳하게 안방을 차지할 수만 있다면 그까짓 사소한 고통쯤은 훗날을 기약으로 능히 참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아름답지는 않지만, 삶을 아름답게 바라보며 살아갈 용기가 생겨나는 기분이다. 그날이 하루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찰거머리처럼 덕배의 등으로 가슴을 디밀어 바싹 붙인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내 남편인데 어때 유! 이제 부끄럽지 않다 여겼다. 한창 신이 오르자 복녀는 자신도 모르게 양옆으로 늘어진 발을 달랑거려 보는데 덕배는 그저 콧노래만 흥얼거리며 앞만 보고 걷는다. 저만치로 키 큰 미루나무가 시린 하늘 아래 가지를 치켜들어 축복 인양 하늘거리는데 복녀는 문득 장난기가 심술로 일어 발동이다. 어디서 그런 발칙한 용기가 생겨났을까? 스스로 놀란 복녀가 숨을 가다듬어 참을 수 없다는 듯 기어이 입을 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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