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 사랑과 은혜의 동산으로 다시 피어나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학창시절, 선생님의 풍금소리에 맞춰 불렀던 ‘동무 생각’이다. 노랫말에 나오는 청라언덕은 어디일까? 상상 속의 청라언덕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저 멀리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언덕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대구의 중심인 계산동에서 30년 동안 직장생활 해온 이현아(50) 씨는 가끔 동산동 제일교회 옆 계단을 오르내리며 산책을 했다. 조용한 이 길을 걸어서 동산병원에도 가고 서문시장에 국수 먹으러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십여 년 전부터 이곳에 낯선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사람들의 형색을 보니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서울에서, 충청에서, 전라에서... 여기에 뭐가 볼 게 있어 왔냐고 물으니 이곳이 ‘청라언덕’이란다.
“내가 무심코 오르내리던 이 언덕이 청라언덕이었다니, ‘동무 생각’의 노래 속에 나오는 청라언덕이 바로 이 언덕이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죠.” 아련한 기억 속의 노래 가사가 현실로 다가와 이 씨의 가슴을 뛰게 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이들에게 이곳 역사를 설명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문화해설사였다. 이 씨는 어느 날 탐방객 틈에 끼어 그의 얘기를 엿들었다. 더욱 놀랐다. 이 언덕은 ‘동무 생각’ 말고도 더 많은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청라언덕이 대구 근대 역사의 살아있는 현장으로 꿈틀거리며 다가왔다.
110여년 전, 성내에 거주하던 선교사들이 이곳으로 왔다. 그때 선교사가 지은 서양식 주택이 그후 동산병원 의사 사택으로 사용되었다.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99년 동산의료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그때부터 이곳은 의료선교유적지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후 10년이 지난 2009년, 대구중구문화원과 동산의료원이 이곳을 청라언덕으로 고증하고 동무생각 노래비를 세웠다. 청라언덕이 새로운 관광지로 발돋음하는 순간이었다.
청라언덕이 이름을 되찾은 후 또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필자는 오랜만에 이 언덕에 올랐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마음 주지 못했던 그곳이었다. 90계단을 올라 동무생각 노래비 쪽으로 갔다. 문화해설사의 집이 보였다. “여기를 떠날 수 없어요. 예약 전화도 받고 리플렛도 나누어주고 길을 묻는 분에게 대답도 해줘야 하고...” 마침 문화해설사 김영주(64) 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2003년부터 18년째 대구시 문화해설사로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대구 동인동에 살면서 시내 구석구석을 다 밟아보았지만 이곳은 그저 쳐다보기만 하고 지나가는 금단의 영역이었지요.” 그가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면서 이곳에 왔을 때도 이곳이 청라언덕인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수많은 탐방객과 마주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의 말이, 예전엔 대구가 그다지 매력 있는 곳이 아니었는데 실제 와보니 생각보다 대구가 삭막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요. 청라언덕 덕택이죠.” 그전엔 대구하면 팔공산 정도만 생각했었다.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대구는 시내 바운더리가 넓지 않아 한꺼번에 다 볼 수 있어 좋아요. 대구역부터 시작해서 이곳까지 보면 고대에서 현대까지 모든 역사가 다 함축되어 있어요.“ 김 해설사 자신도 해설을 하면서 대구는 다른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아기자기한 면을 느낄 수 있는 도시라고 했다.
그러나 대구는 설명이 필요하다. “경주나 안동 영주 정도만 해도 보이는 것이 70%가 되고, 나머지 30%에 해설을 더하면 되는데 대구는 보이는 것이 거의 없어요.” 그냥 보기만 해도 관광이 되는 곳들이 대부분이지만 대구는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라언덕에 와서 사진만 찍는 사람은 청라언덕의 껍데기만 보고 가는 것이다. 박태준의 노래비 앞에서 러브스토리를 얘기하고 함께 노래 부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 시간 동안의 그의 해설은 대구의 역사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었다.
김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연간 20만 명이 청라언덕을 찾는다고 한다. 요즘같은 주말엔 4~5천명이 온단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여기가 성지가 되었어요.” 외지 크리스찬들이 대구에 오면 이곳을 방문하는 것이 필수로 되어 있다고 한다.
마침 봉화 춘양교회에서 안운영 장로(76.전 영남가나안농군학교 교장) 내외와 교우 몇 분이 찾아왔다. 김 해설사는 곧 부스에서 나와 그들을 안내했다. 필자도 일행을 따라 나섰다. 초행자의 마음으로 동행했다.
그는 탐방객을 이끌고 제일교회 앞마당으로 갔다. 계산성당과 옛 제일교회가 내려다 보였다. 그제서야 탐방객들은 이곳이 언덕이라는 실감이 든다고 했다.
언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김 해설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기가 대구 읍성이었고 선교사가 와서 저기에 다섯 채의 집을 사서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시작했답니다.” 그는 청라언덕의 역사는 대구의 역사라고 말했다. 그는 현제명 시비와 대구 최초의 사과나무, 선교사 사택, 그리고 3.1운동길 등을 돌며 해설을 이어갔다.
달성 서씨 문중 묘지였던 이 언덕. 성문 밖의 땅. 묘지 외의 용도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이 땅을 선교사들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곳을 선택했다. 강산이 열두 번 바뀐 지금 이 땅은 대구 시민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는 사랑과 은혜의 동산으로 다시 태어났다.
“경상감영 관풍루에서 관찰사들이 민가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바라보며 민정을 살폈듯이 선교사들은 여기 살면서 자신들의 사랑의 대상인 대구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거예요.” 청라언덕은 성내와 성밖을 연결하는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전망대였고 선교의 전초기지였을 것이라고 김 해설사는 말했다.
안운영 장로 일행은 해설사의 설명에 빨려들었다. “동산의료원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님들이 저희 가나안농군학교에 오셨을 때 청라언덕 얘기를 하셨어요. 여기에 오면 선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꼭 한번 오라고 하셨죠.” 안운영 장로는 그동안 너무 바빠 계속 미루다 이번에 왔는데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며 고마워했다. 함께 온 권영택(64) 장로 내외와 권사들도 “얼마 전 안 장로님으로부터 이곳 얘기를 듣고는 믿음의 뿌리와 신앙 선배들의 발자취를 꼭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며 직접 그 현장을 확인하고는 못내 감격해 했다.
“우리나라가 그 어려웠던 시기에 선교사님들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바친 것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데, 그런 걸 본받아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나라가 한번 해보자고 하는 열심이 식어가는 것처럼 우리의 선교 열정도 식어가는 것 같아 너무 가슴이 이파요.” 신앙의 고향을 찾은 안 장로의 심정은 감동과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청라는 '푸른 담쟁이'를 뜻한다. 이 담쟁이가 선교사 사택들을 온통 뒤덮어 황량했던 죽음의 언덕에 생기와 아름다움을 입혀 주었다. 그래서 푸른 담쟁이넝쿨이 무성한 이 언덕을 청라언덕이라 불렀다.
계성학교에 다녔던 음악 지망생 박태준은 이 언덕에서 마주쳤던 백합같이 아름다운 신명학교 여학생을 잊지 못했다. 훗날 마산 창신학교에서 함께 근무하던 동료 교사 이은상이 이 사연을 듣고 노랫말을 지어주었다. 거기에다 박태준이 곡을 붙인 것이 '동무 생각'이다.
작곡가 현제명, 시인 이상화, 소설가 현진건, 화가 이인성 등이 오르내리던 이 언덕. 남성로 제일교회 자리(현 대구 기독교역사관)에서 시작된 선교사들의 의료활동이 이 언덕으로 옮겨져,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을 건져냈다.
달성토성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산이라 불리기도 한 청라언덕. 이곳엔 대구 근대화 역사의 정수가 담겨져 있다. 그래서 대구 근대문화 골목 여행길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문화해설사의 해설이 곁들여져 청라언덕은 새로운 명소로 거듭났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행렬을 이루고 있다. 신자들, 학생들, 어른들, 연인들, 심지어 외국인들까지 찾아온다. 최근엔 연일 대만이나 홍콩, 싱가포르 등지에서 단체 관광객들이 대구를 찾아와 이곳을 거쳐 가고 있다.
청라언덕을 찾는 사람들은 애틋한 사랑의 감상에 젖어든다. 급기야 청라언덕은 ‘대구의 몽마르트르 언덕’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나 청라언덕엔 예술가와 문학가의 사랑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한 애타는 가슴을 안고 거친 숨을 내쉬며 뛰어간 솔숲길. 빨래바구니에 태극기를 숨겨 가슴을 졸이며 달음박질쳤던 이 언덕길. 여기엔 조국을 찾으려는 민족의 눈물과 피가 뿌려져 있다. 애끓는 만세의 함성이 서려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청라언덕엔 가슴이 따뜻한 먼나라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이 배어 있다. 가난한 나라 불쌍한 영혼들을 사랑하여, 전염병으로 아내와 자식을 잃어가면서까지 이곳에서 인술을 베풀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의 눈물이 서려 있다.
그래서 청라언덕의 클라이막스는 '은혜 정원'이다. 선교사들의 묘지 앞에 선 관람객들은 종내 마음이 숙연해진다. “자기나라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던 그들이 왜 전염병 창궐한 이곳에 왔을까요? 그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조선을 너무나 사랑하여 여기서 인생을 다 보내고 여기에 묻혔습니다.” 해설사의 얘기를 들으며 방문객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제 청라언덕 박태준 시비 앞에 이르렀다. 어린 시절 교실에서 불렀던 가곡이 불현듯 떠오르고 이내 권영택 장로의 입에서 부드러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일행도 해설사도 모두 하나가 되어 함께 노래했다. 7월의 뙤약볕 아래 옛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두 개의 십자가가 내려다보는 이 곳 사랑과 은혜의 동산에서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 노래의 가사가 더 깊이 이들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렇다. 푸른 담쟁이처럼 위를 향해 끝없이 이어온 우리네 인고의 삶에도 끝내 새 생명이 피어나면, 이 세상의 모든 슬픔도 그 아렸던 아픔들도 정녕 사라지고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