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밖에서 다윗을 찾는다면, 우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기억의 저편에서 떠오른다. 블레셋의 골리앗을 넘어뜨리기 위해 살기를 잔뜩 머금은 눈을 부릅뜨고, 긴장된 육체미를 쏟아내는 그 다비드상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다윗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청년 왕으로 기억한다.
이런 이미지의 다윗을 마르크 샤갈의 <다윗 성채>에서 만났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샤갈은 색채의 마술사답게 다윗을 현란한 복장을 갖춰 입은 광대로 변신시켜 놓았다.
샤갈은 벨라루스의 비텝스크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이었기에 그는 생태적으로 성경을 삶의 근간으로 삼았다. 자연히 그의 그림에는 성경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다윗 성채>이다.
이 작품에서 샤갈은 다윗을 왕이라기보다는 수금을 켜며 노래하는 음악가로 그렸는데, 다윗의 복장이 심상찮다. 풀빛 모자에 큼직하고 붉은 무늬가 박힌 망토는 영락없는 광대의 복장이다.
“나는 예수의 수난을 표현한 그림이나 다른 종교화를 그릴 때면 서커스 인물을 그릴 때와 거의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한다.”
고 샤갈이 스스로 고백했듯이 그는 성서 속의 인물과 광대에게서 정서적 유사성을 감지해 내고 있었다.
멀리 다윗 성채가 보이고 그 위로 일군의 군중들이 모여 다윗이 타는 수금의 노래에 맞추어 찬양하고, 검은 하늘에는 천사들이 나와 다윗의 수금 솜씨에 공감하는 듯하다. 그리고 한 쌍의 연인도 그 하늘에 떠서 다윗의 연주에 동참하고 있다. 다윗을 제외한 등장인물들을 밤하늘에 둥둥 띄움으로써 화면을 매우 비현실적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는 샤갈 그림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데, 분위기를 환상적인 데로 이끌어 들인다.
샤갈의 그림에 자주 나타나는 오브제인 양이 떨기나무 아래에서 서성이고 있다. 성경 속의 그 어린 양일 터이다. 또 하나의 오브제는 금방 눈에 들어오진 않지만, 군중 속에서 아기를 안은 여인인데, 이는 샤갈에게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한 그의 부인 바바이다.
다윗은 수금에 취한 듯 맑은 얼굴 속의 푸른 눈을 들어 허공을 쳐다본다. 얼굴 가득히 환희가 넘쳐난다. 한 손은 수금의 현을 눌러 소리를 죽이고, 한 손은 수금의 현을 퉁겨 소리를 살려내고 있다. 생멸의 어울림이 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신비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다윗은 이미 골리앗을 넘어뜨린 소년 목동도 아니고, 권력을 휘두르는 이스라엘의 왕도 아니다. 수금을 타고 노래를 부르는 풍각쟁이 예술가일 따름이다. 다윗에게는 권위도 강기도 찾아볼 수 없다. 예술적 감성만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다.
샤갈은 어찌하여 다윗을 노래하는 수금 연주자로 그렸을까? 물론 다윗이 악령을 물리치기 위하여 수금을 탄 사실을 기록한 성경의 사무엘상을 본으로 삼은 것이야 다 알려진 사실이고. 음악가인 다윗에게서 샤갈은 자신의 모습을 찾은 것은 아닐까? 아니, 자신을 다윗으로 등장시킨 것은 아닐까? 다윗 성채를 그리는 샤갈 말이다. 어쨌든 샤갈은 이 그림을 그리면서 다윗의 시를 읊지나 않았을까.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시편 150편 3절~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