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때 원병으로 왔다가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대구에 정착
위치 :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 525길 14-2
모명재(慕明齋)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복야공(僕射公) 두사충(杜師忠)의 후손들이 그의 덕과 뜻을 기리기 위해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건물이 낡아 1966년 2월 중수하였다.
모명재는 네모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풍 기와집이다.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있고 앞쪽에는 반 칸 규모의 툇마루를 두었다.
모명재라고 이름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대문에 달려있는 만동문은 '백천유수필지동(百川流水必之東)'이라는 말에서 따 온 것인데 이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순신 장군이 지어 보냈다는 한시가 새겨져 있는 대청기둥, 충무공의 7대손인 삼남수군통제사 이인수가 비문을 지은 신도비, 명나라에서 가져온 청석으로 다듬은 2점의 동물조각상이 있다. 뒷산 형제봉 기슭으로 두사충의 묘소가 있다. 두사충을 포함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5인의 선조를 기리고 있다.
두사충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군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참모로 조선에 왔다. 풍수전략가인 그는 1592년 임진년에는 수륙지획주사로, 또 1597년 정유년에는 비장(裨將)이라는 각기 다른 직함을 가지고 전란에 참여했다. 그는 주로 병영터를 고르고 군진을 전개할 때 조언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명나라 군이 조선군과 합동작전을 할 때에도 조선측과 전략 · 전술상 긴밀한 협의를 했다.
두사충의 호는 모명으로 중국 두릉(杜陵)이 고향이다.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원병으로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귀국하지 않았다. 명나라가 점차 쇠퇴하는 것을 보고 조선에 귀화할 것을 결심한 그는 대구에 정착하여 두릉 두 씨의 시조가 되었다.
귀화한 두사충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받았다. 두사충은 경상감영을 대구로 옮기기를 주장했던 체찰사 이덕형과 가까웠다. 나중에 자신이 하사받은 땅이 감영을 설치하기에 최적지임을 알고 그곳을 국가에 헌납하고 주거지를 계산동(뽕나무 골목) 일대로 옮겼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가 두 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명나라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어 최정산(最頂山, 현재의 대덕산) 밑으로 거주지를 옮긴 그는 대명단(大明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명나라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 그 후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칭했다. 그의 사후에 자손들은 형제봉 기슭에 묘소를 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