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200)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200)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4.12.28 10: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반빗아치임에도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붙임성이 있어 보여 곰살맞다
마수걸이 손님을 맞아 무어라도 팔아야겠다는 의욕이 강해 보였다
꽃신은 아니라도 마구잡이로 신을 허름한 코고무신이라도 사고 싶었다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유수랄까? 눈앞으로 슬픈 초겨울만 무심하게 지난다. 에메랄드빛 하늘 아래 하얗고 푸르스름한 풍경에 취해 만사를 잊는다. 한데 어느 순간 가슴이 따뜻하다 싶은데 눈을 돌릴 수가 없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다. 옆으로 앉은 덕배가 손등을 가만히 눌러서 포개어 잡고 있다는 느낌이다. 새벽녘의 달콤한 꿈만 같아서 깨어질까 두렵다. 그러면 그렇지 이대로 나를 버리지는 않겠구나! 창밖을 지나는 모든 풍경이 일그러졌다가 본래로 돌아온다. 근데 진짜 어디로 가는 걸까? 도대체 감이 잡히질 않는다.

한참을 더 달려 복녀 일행이 도착한 곳은 읍내 면사무소였다. 이 이른 시간에 여기는 왜 왔을까? 아기는 아직 뱃속에서 기약이 없는데! 꿈속처럼 출생신고는 아닐 테고, 그럼 무슨 볼일로! 자문자답의 복녀는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기어이 버리려 한다면, 칠거지악을 따지고,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삼인성호처럼, 집단으로 몰아서 미친년으로 만들려면 경찰서여야 하는데 면사무소에는 왜 왔을까? 행여나 잃어버릴라! 덕배 뒤를 그림자로 따라 주춤주춤 들어서고 보니 분위기가 사뭇 엄숙하다. 꿈속에 본 듯 기시감이 드는 것도 잠시다. 분위기에 압도당해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다. 그런 복녀와는 달리 서류 특유의 큼큼한 냄새가 풍기는 가운데 출근 시간대라 그런지 실내는 인사치레로 분주하다.

잠시 후 고모부를 제외한 넷이 대기실 앉아 조용히 기다릴 때다. 청하지도 않았건만 열 서넛 남짓으로 보이는 앳된 소녀가 김이 오르는 찻잔을 들고 와 상냥하게 웃으며 권한다. 반빗아치임에도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붙임성이 있어 보여 곰살맞다. 그 때문인지 딱딱한 분위에 주눅이 들어 어려운 줄로만 알았는데 한결 편안해지는 마음이다. 노란 소국(小菊)이 소담스러운 찻잔을 들어 권커니 잣 켜니 따끈하게 음미하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부르더니 서류 일체를 내주더니 천천히 작성해서 오란다.

서류 작성 일체는 행랑아범이 맡았다. 복녀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자니 그건 분명 혼인신고서다. 행랑아범이 남편을 뜻하는 ‘夫’란 난에 ‘崔德培’ 라 적고 아내를 뜻하는 ‘婦’란 난으로 ‘吳福女’ 라 가지런하게 적는 데는 가슴이 절로 뛴다. 두렵고 무서운 상상은 간 곳 없고 무심히 들여다보며 서 있는 덕배의 옆모습을 보는 복녀의 얼굴이 화끈하다. 지금의 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나랑 같은 마음일까?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든가 않고는? 온갖 오해를 상상으로 차를 타고 오는 내내 궁금했는데! 그저 신통방통으로 깨물어 주고 싶은 심정이다. 옆으로 사람만 없다면 양팔을 활짝 벌려 품 안으로 파고들고만 싶다. 가슴이 넓은 호수라면 한 마리 개구리가 되어 뛰어들고 말리라! 갖은 애교를 떨어가며 마음껏 유영하고 싶어라! 아픈 과거는 과거일 뿐, 이제야 진정한 부부가 되었다는 생각에 날아가는 기분이다.

단지 성씨로 ‘吳’ 자를 보는데 새벽녘의 꿈속처럼 여전히 마음이 아리다. 평소 양아버지는 성씨에 대해 장황했다. 고려 태조 왕건을 소환했다. 태조 왕건이 특별히 하사한 성씨로 더없이 귀하다며 영광스럽다고 했다. 뼈대 있는 양반 집안이라며 엄지를 곧추세웠다. 태조 왕건의 두 번째 부인인 장화왕후를 들어 왕건이 금성(현재의 전라남도 나주) 땅에 이르러 목이 말라 물을 청할 때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성급하게 마시면 체한다며 물바가지 속으로 버들잎을 띄웠다며 지혜로운 여인이라 했다. 고려 제2대 왕인 혜종[왕건 첫째 아들로 태자 무(武)]을 낳았다며 당시의 왕비 중 최고란다. 그런저런 전후한 공을 따져 나주지방의 호족이자 아버지인 오다련을 기려 특별히 하사한 성씨라고 추켜세웠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가슴 뿌듯하게 자랑스러웠다. 한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입에 담는 것조차 부끄럽고 저주스러울 뿐이다.

본적 등 일체의 서류 작성이 끝나자 그 밑으로 행랑아범과 고모부가 차례로 이름을 적고는 도장을 꾹꾹 찍어 날인이다. 아마도 혼인을 확약한다는 연대보증인만 같다. 그즈음 덕배는 저 혼자 바쁘다. 부산하게 품 안을 뒤적거려 서류 꾸러미를 꺼내고 있었다. 저 많은 서류 뭉치를 언제 준비했을까? 주섬주섬 간추린 서류를 첨부하여 담당 직원에게 일괄제출이다. 받아든 서류 꾸러미를 한참 동안 뒤적이며 요모조모 살펴보던 담당자가 환하게 웃으며

“신고가 조금 늦었네요! 하여간 고생하셨고, 두 분 축하드립니다” 정색으로 모든 절차 끝났다고 했다. 통상적인 인사로 일행 모두가

“감사합니다”를 건네고 돌아 나오는데 덕배도 복녀도 행랑아범과 고모를 두고 코가 땅에 닿을 만큼 굽신굽신 배꼽 인사다. 그러지 말라고 손사래로 만류해도 소용이 없다. 두 번 세 번에 걸쳐 머리를 조아려가며 연신 감사하단다. 인사가 끝나 휘청휘청 걸음을 재촉하는 덕배는 복녀를 향해 얼굴을 불그스레하여 붉혔다. 잔뜩 미루어 오던 숙제를 마친 듯 앞니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싱겁게 웃는다. 종종걸음에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가며 마주 보는 복녀도 얼굴을 벌겋게 상기되기는 마찬가지다. 은근하게 배를 쓰다듬어 ‘이 어미가 보금자리를 찾듯 애야~ 너도 이제야 네 아버지를 제대로 찾았구나!’ 입꼬리가 귀에 걸린다.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시간이 없다.

면사무소를 나오자 다음 차 시간까지는 한 시진 하고도 반 식경이나 남았다. 찬바람을 피해 만만한 다방으로 갈까? 다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어슬렁거리는데 고모만 바빠 보인다. 당장에 복녀의 손을 후려잡아 이끌고는 신발 점은 찾는다. 한데 굳이 찾을 것도 없었다. 세물전(貰物廛) 옆으로 빤하게 ‘대한 신발상회’란 간판이 보였다. 엎어지면 코가 닿는다고, 2~3분여를 걸어 도착하고 보니 이른 시간대라 그런지 아주머니 한 분이 매대마다 각종 신을 펼쳐놓고는 차곡차곡 진열 중이다.

극장의 의자 배열처럼 뒤로 갈수록 높아가는 가판(街販)대 앞으로 허리를 구부정하게 모내기 자세다. 엎드려서 한참이나 진열에 열중이던 아낙이 등 뒤로 인기척을 느꼈는지 은연중 돌아보더니 분에 넘치게 호들갑이다.

“하이고 어서들 오시이소! 이른 시간대에 오셨네요! 이 시간에 다들 아침은 자시시고 오셨나요?” 저 홀로 반가워서 설레발로 맞는다. 마수걸이 손님을 맞아 무어라도 팔아야겠다는 의욕이 강해 보였다. 어떻게든 흥정을 붙여 볼 심산인지 발을 번갈아 보며 이 신 저 신을 양손에다 이리저리 옮겨가며 들었다가 놓기를 무한 반복이다.

그러게나 말게나 고모는 복녀의 발 쪽을 유심히 살피더니 꽃신 하나를 고른다. 흰색 바탕에 양옆으로 일지매(一枝梅)라, 홍매화를 수놓은 꽃신도 눈에 들었건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붉은색 계통으로 집어 들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는 꽃신은 뒷굽은 오뚝하고 앞쪽으로는 물결문양이 가지런하다. 신 전체로는 당초(唐草) 무늬 문양 등, 전통문양을 곁들여서 오밀조밀하게 큰앵초인가? 꽃을 자수한 것으로 보아 쾌 값나 보였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가계 주인아주머니가

“하이고 마님! 마님 얼굴만큼이나 예쁜 신으로 고루 셨네요! 눈썰미가 보통은 아닌 갑쇼 예~!” 호들갑을 떨더니

“마님이 신으시게요!” 아래위를 유심히 살피더니 안성맞춤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하지만 관심 없다는 듯 복녀를 돌아보는 고모는

“이보게 복녀 동생! 이리 와서 이거 한번 신어 봐봐!” 손짓이다. 그때까지 고모의 하는 양을 부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복녀가 화들짝 놀라서는 질색이다.

“아~ 아니, 아니 야유! 어~ 언니!” 자신도 모르게 손사래다. 하긴 복녀도 은연중 꽃신이 욕심이 났다. 그렇다고 빌어먹을 내 처지에 언감생심, 꽃신은 아니라도 마구잡이로 신을 허름한 코고무신이라도 한 켤레 사고 싶었다. 아니 세물전에서 헌 신을 세 놓는다면 머리채라도 잘라 빌리고 싶었다. 이는 신이 탐나서가 아니었다. 집 나설 때까지만 해도 위태위태하여 간당간당하던 고무신의 밑창이 기어이 뚫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모래 알갱이가 맨 먼저 인사치레다. 제집을 차지해서 사방팔방으로 모나게 굴러다닌다. 그 바람에 걸을 때마다 가시가 찔려오듯 발바닥이 따가워서 아프다. 차라리 맨발바닥이 낫다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그렇다고 궁상맞은 살림살이를 표라도 내는가? 저만치로 있는 덕배의 눈치를 보아 마음껏 내색도 할 수 없는 처지다. 이를 악물어 속으로 참으며 겨우겨우 버티어 오는 중이다. 한데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과분하게 꽃신을 신어보라며 권하고 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