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서부초등학교는 1919 대구 공립 여자보통학교로 설립되어 1941년 서부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그 후 학명 통일로 1996년 서부초등학교로 변경, 올해 6월 1일로 창립 100주년을 맞는 유서 깊은 학교다. 작년까지 99회로 졸업생이 4만8천65명이다. 학교는 서구 비산동에 위치해 있으며 이은숙 교장이 맡고 있다. 교화는 장미, 교목은 향나무이며 현재 381명이 재학 중이다.
서부초등 34회(해방 9회) 동기회(회장 김정웅)는 평균 79세의 나이다. 해방 9기 동기생들은 6.25 사변을 겪고 1954년 졸업을 했다. 40세 때부터 동기회를 결성해서 오늘날까지 40여 년을 매월 9일 날 동기회를 하고 있다. 80여 명의 동기생이 졸업했는데 외국 이민도 가고 또 자녀를 따라 다른 지방으로 간 사람도 있고 또 유명을 달리한 친구도 있어 지금은 30여 명 정도가 매월 만나고 있다. 34기 동기생 중 안준광(79세) 씨는 육군사관학교를 21기로 졸업해서 3사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하고 대령으로 예편했다. 이정수 씨 또한 대령으로 예편했다. 박국홍 씨는 부장 판사를 역임하고 퇴임해서 부산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다. 안준광 대령은 80의 고령인데도 마라톤 마니아다. 안 대령은 마라톤 풀코스 42.195km를 60회 완주한 경력이 있다.
안준광 대령의 회고담을 옮긴다.
우리 동기생은 1941년에 주로 태어나고 5세 때 해방이 됐다. 1948년 서부초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 학교 별관 목조건물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2학년을 마치고 1950년 3학년이 되어 본관 교실에서 공부하던 어느 날 <북한 공산군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다음날 담임 이대의(李大義) 선생님이 38선 부근의 전황과 북괴군 전차의 위력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집으로 왔다. 무기한 휴교! 우리가 공부하던 학교는 신병훈련소가 되어 연일 장정들이 훈련을 받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해 여름 우리는 릴레이식으로 등교 소식을 전하며 달성공원에 모였다. 우리 담임 이대의 선생님은 입대하시고 윤기옥 선생임이 부임하셨다, 우리는 낡은 흑판 하나를 들고 비산동 어느 야산으로 가서 죽어가는 소나무 가지에 흑판을 걸어놓고 수업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달성공원에서 반별로 옹기종기 모여 수업했다. 달성공원은 서부초등학교, 대성초등학교, 수창초등학교 등 여러 학교가 지역을 나누어 사용했으니, 더욱이 51년 1.4 후퇴 이후 피난민 학교까지 생겼으니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
젊은 남자 선생님들은 모두 입대하셨기 때문에 선생님 수가 절대 부족하여 한 선생님이 두 반을 맡아 가르치셨다. 그 당시 한 반에 80명 가까운 학동들이 있어서 한 선생님 밑에 자그마치 160명가량의 꼬마들이 매달려 있었으니 선생님도 꽤 힘드셨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가방이 없었다. 전쟁터에서 흘러들어온 기관총 탄통이 가방이자 의자였고 여름철에는 좋은 물놀이 기구였다. 그 무렵 우리에게는 동요가 없었고 다만 군인 아저씨들이 힘차게 불렀던 군가가 우리의 음악이었다. 겨울이 왔다. 방법이 없지! 서문교회 1층 골방에서 이 많은 학생들이 빼곡이 앉아서 수업을 한다. 일어서면 자리가 없어진다. 소변이 마려워도 자리를 안 뺏기려고 참노라면 오줌을 지리기도 했다.
4학년 때는 달성공원 관풍루가 우리 교실이 되었다. 관풍루는 대구의 명물이고 문화적 가치가 높은 것이지만 그 당시는 그런 것 생각할 여지가 없다. 관풍루 1층 2층 외곽 기둥에 각목을 대고 얇은 판자로 벽을 쳤다. 2층 남쪽 편에는 창호지를 발라 채광을 빛이 잘 들도록 했다. 바닥은 능력대로 각자 집에서 가져온 가마니를 깔아 한기를 막았다. 처음으로 도마 책상 앞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참 신기했다. 교실 난로는 드럼통 1/2쪽에 아이들이 주워온 나뭇가지로 불을 때는 형편이었다. 이 교실에도 역시 2개 반이 합반이어서 160명 정도가 수용되었다. 1층 3반 4반, 2층 1반 2반. 그 외 우리 친구들은 어디서 공부를 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성인이 되어 서로 만났을 때 생면부지의 동기생도 있었다.
우리 선생님은 상의 군인 이상도(李相道) 선생님이시다. 안동 사범학교 출신인데 군인정신이 꽉 들어 있었다. 매우 엄하시고 우리에게 남자답게 자랄 것을 주문하셨다. 때로는 160명 전원이 일어나 군가 자세로 반동을 주면서 군가를 힘차게 부르게 했는데 이때 관풍루가 흔들흔들한다. 그래도 우리는 신나서 군가를 불렀다. 훗날 내가 육사에서 토목공학을 배울 때 <회전 모멘트의 작용>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문득 이때의 상황이 연상되어 그때 군가를 부르다가 관풍루가 무너졌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6학년이 되던 해 우리는 평리동 모퉁이에 가교사를 짓고 그리로 이전했다. 판잣집이지만 한 반에 한 교실이 배당되고 책상도 개인 책상이 주어져서 그래도 학교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지나고 보니 다시는 아련한 추억들이다.
시 쓰기를 즐기는 안준광 님의 시를 소개한다.
짧은 만남 긴 이별/안준광
화사한 웃음
고운 눈빛으로 찾아온 너
밝은 미소 산뜻한 향기로
내 마음을 설레게하던 너
다소곳이 다가와 내게 기대며
영원히 떠나지 않을것 같던 너
이제 헤어져야할 시간이 되었나
너의 고운 눈에 맺힌
맑은 이슬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차마 바라볼수 없어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의 짧은 만남 긴 이별
꽃비 흩날리던 날
안타까운 마음
이별을 숙명으로 받아드리며
긴 세월 하염없이 기다릴테다
내년 봄 다시 너를 만날 때 까지
<시작노트>
청계사 산행중 벚꽃 꽃비 내리던 날2017, 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