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의 ‘남편’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 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시집『지금 장미를 따라』민음사 2016.05.27
아버지는 내 나이 갓 스물에 돌아가셨다. 참으로 아득한 이름이다. 오빠는 아예 가진 적조차 없는 내 것이 아닌 촌수다. 그래선지 어색하고 입에 잘 붙지 않는 명칭 중의 하나다. 요즘 젊은 유부녀들이 사용하는 호칭이 거슬린다. 텔레비전 연속극은 물론이고 주변에서도 남편을 '오빠'라 부르는 게 당연한 것처럼 치부된다. 습관이랄까. 결혼하고도 연애시절에 쓰던 그대로 호명하거나 지칭하는 게 편한 모양이다. 까짓, 세대차려니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예순 줄인 지인이 남편을 '아빠'라 할 때는 뜨악해진다. 촌스러운 내 정서 탓으로 돌려야하는지, 듣기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이쯤 되면 헷갈리는 정도를 넘어 촌수란 기본 질서가 무너지는 것 같다.
‘님’이란 글자에 점 하나 찍으면 ‘남’이 된다고 하던가. 남편을 두고 남의 편이라고 말하는 건 이미 고전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한 이불 덮고 살지만 어디까지가 내 사람이고 어디부터가 남의 사람인가,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있다. 내 편과 네 편, 이 둘을 경계 지을만한 확실한 기준 잣대는 없지만 아무래도 집안의 길흉사가 생기면 구체화됨을 느낀다. 좋은 일에 나서는 사람은 네 편일 수 있고, 궂은일에 나서는 사람은 내 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면 판단 미스일까?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기쁨을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는 말이 있다. 어떤 관계든 대개가 이 틀에 맞물려서 살아가지 않나 싶다.
이 시는 여성 독자라면 200% 공감하리라. 별반 시적 장치가 없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읽게 된다.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를 남편이라 명명한 것부터 신선하다. ‘남편’ 속에 많은 함축이 스며있을 게다. 나는 남편 잘 만났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부부 일을 제3자가 어찌 다 알까. 표면적인 것만으로 속단할 수 없는 문제인데.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그게 세상 이치겠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는 것처럼 전생의 원수를 만났는가 싶다가도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싶을 때가 있으니까 사는지도 모른다.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면서 아프면 제일 먼저 약을 사다주는 남자기도 하다. 당장 갈라설 듯 무섭게 싸우다가 밥을 안치는 게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