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삶의 속으로 녹아들기 위해서 조용히 손을 흔들며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여전히 낙엽은 발밑에서 바스락거리고 가을볕은 나뭇가지 사이에서 따사롭다.
무주구천동에 있는 어사 길은 삼공리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약 6Km정도의 오솔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원래 차량이 다닐 수 있는 임도가 있지만 덕유산에서 흘러내리는 벽계수를 사이에 두고 새로이 길을 냈다. 좁은 산길이다 보니 군데군데에 돌부리와 나무뿌리가 얽히고설키었다.
이 길이 어사 길이 된 것은 1723년(경종 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뽑힌 후 조선후기 호조참판, 병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어사 박문수에서 ‘어사’란 단어를 따온 것이다. 4차례에 걸쳐 어사로 파견될 당시 무주구천동에 들러 민생을 두루 보살펴 백성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준 치적을 기억하고자 함이다. 이는 사실에 입각했다 치더라도 어사로서 박문수의 행적이 허구로 각색되며 설화나 구전 등으로 많이 전해지고 있는 것은 청렴한 관리로 백성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어루만져 준 그간의 공로 등이 암암리에 나타난 결과이다.
초가삼간 찌그러진 집에 들어갔다가 가난을 핑계로 청혼자에게 파혼을 종용받는 그들의 후견인이 되어 좋은 배필로 맺어준 사건, 중과 동행 중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여인을 겁탈하고 도망 중일 것을 알고 잡아들여 죽은 여인의 원한을 풀어준 사건, 또 어느 사건은 무뢰한들에게 쫓기던 사람을 보호하지 못해 그를 죽게 만드는 잘못을 범하였고 그때 원님놀이를 하던 한 아이가 그 이야기를 듣고는 “잠깐 장님 노릇을 하면 되는데 그것도 모르느냐”고 꾸짖음을 당한다. 이 외에도 박문수 전에는 많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아서 코난도 도일의 소설 속 주인공인 셜록 홈즈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포와르를 연상케 하는 추리기법으로 명확하게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그 통쾌한 모습에서 관리들의 횡포나 억압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은 잠시나마 희열을 맛본다.
경주 남산의 불상을 돌아보던 어느 작가가 “석공의 명장이 익히 돌 속에 계신 부처님을 정교하고도 세련된 기법으로 찾아내었다”라고 말했다면 어사 길 역시 예전부터 쭉 있었던 길을 근래에 진지한 작업 끝에 찾아낸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길 위에도 늦가을이 완연하다. 바람이 불자 낙엽이 흩날리고 그 사이를 헤집는 햇살이 밝아 눈이 부시다. 벌써 가을이 농익어 산길은 쿠션을 깔은 듯 발자국이 푹신하다. 몇 장 주워서 책갈피에 간직하고픈 마음을 달래며 돌계단을 오른다. 여전히 낙엽은 발밑에서 아우성이건만 조잘, 재잘거리는 이야기에 묻히어 한 풀 기가 죽는다. 길은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고 뱀이 기어가듯 구불텅하다. 길의 흐름에 따라 울렁거리는 발걸음 역시 잠시도 지겨울 틈이 없다. 올랐다가 내리고 내렸다 싶으면 오르는 길을 꽤나 걸었다 싶은 찰나 어느 한 지점에서 가을에 묻히고자 여장을 풀었다. 원래부터 백련사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거기에 안성맞춤과 같은 자리가 눈에 들자 주저앉은 것이다.
차를 타고 오는 길에서 무주구천동이란 단어에서 무진기행을 떠올려 오늘의 일정을 머리에 그린 탓이기도 하다. 늦가을의 짙은 안개를 보고 떠올린 기억이건만 후회는 없다. 오히려 주인공의 길을 걷듯 즐기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보니 어사 길을 찾아가는 차창 밖으로 늦가을의 짙은 안개가 자욱하다.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는 속에서의 달리는 차량은 어쩌면 한 마리 용으로 변해 구름을 희롱하는 듯하다. 반대편의 차량행렬이 없었다면 실제로 구름 속에 든 기분이었을 것이다.
제약회사의 상무 직을 따 놓은 당상으로 무진여행에 나선 그날도 실체를 감추려는 안개가 이렇게 자욱했으리라. 우연한 기회에 돈 많은 과부를 아내로 두고 보니 흡사 사육당하는 기분을 떨칠 수 없던 차에 덤처럼 주어진 무진기행, 소설 속의 무진은 어디쯤일까? 향적봉으로부터 흘러내린 산줄기의 어느 한부분에 자리한 바다가 보이는 지점일까?
짙은 안개는 폐렴으로 고생하던 어린 시절의 가난이란 꼬리를 사려 감추고 있었다. 또 어쩌면 무명의 사회생활을 지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의 불행한 기억들이 살아 숨 쉬는 무진은 처음부터 안개의 도시였다. 그 곳에서 그는 음악선생으로 재직 중인 허인숙을 만난다. 성악을 전공했다는 그녀는 유행가를 구성지게 부르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변호사를 직업으로 둔 친구는 돈도 없고 배경도 없어 출세 길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그녀를 언감생심 결혼이냐며 손을 내젓고 잠시 심심풀이의 노리갯감 정도로 즐긴다고 했다.
길게 허리를 편 방죽의 끝 지점의 갈대숲은 정열인 양 거친 해풍에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정을 나눈 허인숙은 안개도 많고 볼 품도 없는 무진을 떠나고 싶다며 서울로 데려다 달라고 하자 이에 선뜻 응한다. 허인숙은 진정으로 원했을지라도 따지고 보면 객기에 불과한 대답이었다. 그러기에는 인생을 저당 잡히는 모험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감정들은 짭조름한 해풍이 이마를 스치고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졌으며 마침내 현실로 돌아온다. 허인숙 또한 진작부터 그걸 알고 있었다. 서울에 가보았자 찬밥 신세로 전락한다는 것을 진즉에 인식한 것이다. 서울이 싫다지만 그녀를 꼭 데려갔다고 말하지만 자신이 없다.
예정보다 일찍 돌아오라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는 갈등도 잠시 썼다가 찢기를 반복, 결국 작별의 편지조차 쓰질 못하고 서울 행 기차를 타고자 역으로 나간다. 유토피아 같은 이상의 삶보다는 현실적인 삶이 더 중요했고 낭만적인 사랑보다는 물적인 풍요가 주는 안락함과 명예를 차마버릴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하고 비굴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역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삶 속으로 녹아들기 위해서 조용히 손을 흔들며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산골짜기를 굽이굽이 지나 돌을 타고 넘은 벽계수가 작은 소를 이루었다가 쪼르르 흘러간다. 물은 늘 물 그대로다. 떨어진다고 투덜거리지도 않고 비워지면 채워주고 넘치면 다투질 않고 흘러내린다. 상선약수가 되어 함께한 가을의 잔상들이 물 가장자리에 부평초처럼 빼곡하게 늘어섰다. 그 옆을 또 다른 가을이 조잘조잘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천천히 유영을 즐기다가 아래로 향한다. 아기자기한 가을의 이야기가 정겹고 귓전에서 가렵다.
배낭을 벗고 카메라를 설치하자 뒤늦게 올라온 도반 몇몇이 합세를 한다. 굳이 목적지까지 갈 필요가 없다며 털썩 주저앉은 모습이 내 모습 같았고 진작부터 여기에 앉아야 한다는 듯 자연스럽다.
카메라는 조리개가 열리는 순간부터 닫히는 순간까지의 모든 형상을 기억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런 성질을 이용하여 촬영하는 기법이 빛의 궤적이다. 별의 흐름, 자동차의 흐름, 파도를 잠재워 안개의 현상을 만드는 것 등이다. 붉고 노란색의 나뭇잎이 물위에 떠서 느릿하게 움직이는 모양을 느린 스피드로 담으면 의외의 환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단지 사람이나 다른 움직이는 피사체를 넣는다면 조금 떨릴 수 있지만 그 정도는 봐줄만하다.
점심이라고 배낭에서 꺼낸 것은 달랑 김밥 한 줄이지만 각자의 배낭을 겨워 너럭바위 위에서 상을 펼치자 역시 중간에서 주저앉아 버린 결정은 탁월한 선택임을 알게 되었다. 인생의 갈등을 가져온 허인숙의 만남 이상이다. 특히 그 비싸다는 송이버섯도 서넛 보인다. 무진기행이 주는 쓸쓸함과 인간의 고뇌, 인간본연의 속물근성이 아닌 원초적인 본능이 푸성한 즐거운 하루다.
하산 길은 넓은 임도를 택했다. 유난히 붉은 단풍잎이 자지러지는 산행 길에서 길고 짧음을 잊는다. 여전히 낙엽은 발밑에서 바스락거리고 가을볕은 나뭇가지사이에서 따사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