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생명을 해코지 하는 것은 불교라는 종교를 떠나 죄를 짓는 것이다.
문을 나선다는 것은 다른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청송 주산지는 청송군 주왕산면 주산지리 깊은 산중에 자리한 아담한 저수지다. 아주 평범한 듯 특별나 보이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면 그냥 무명에 가까운 저수지다. 그랬던 저수지가 영화 한편으로 인해 특별한 장소로 탈바꿈한 것이다.
유명세답게 매년 가을철이면 주산지는 그 몽환적인 풍경을 즐기려는 관광객으로 인해 작은 산골마을은 차량사태를 맞는다. 임시주차장도 모자라 길 가장자리로 길게 장사진을 친다.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기지개를 켠 나무 아래로 난 포장길을 약30~40분쯤 오르면 엄마의 치마폭에 숨은 소녀의 미소를 닮은 듯 다소곳한 저수지 하나를 만난다. 이른 새벽임에도 저수지 주위는 병풍을 두른 듯 온통 관광객들로 진을 치고 있다. 차량이 뜸했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첩첩산중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현재는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차량들은 포화상태를 이룬지 오래다.
주산지를 오르는 길은 심심치가 않다. 당나귀가 꽃수레를 보고는 성가시다는 듯 투레질을 하는 길 앞쪽으로 “쑥떡 입니더~ 맛 좀 보이소! 꿀 사과도 맛보시고요!”유혹의 손길이 뻗고 사과를 비롯하여 버섯, 떡, 서리태, 누렇게 늙은 호박, 붉은 팥 등등 각종 농산물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새벽을 깨워 관광객들의 발길을 잠깐잠깐 묶는다. 설령 아침을 거르고 불일이 급해도 걱정할 것은 없다. 칼국수, 어묵, 라면 등등 요기를 할 수 있는 식당과 공중화장실도 두엇 있다.
주산지는 어느 때가 가장 아름다울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어찌 등위로 판가름할까? 딱히 꼬집어 말한다면 가을철이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단풍과 물안개 그리고 왕버들의 하모니는 가히 환상적이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때 경기도에서 안날 저녁 10시 경에 출발했다는 관광객은 “별로 볼 것도 없네! 고작 이런 풍경을 보려고 잠을 설쳐 새벽을 달려왔나?”고 푸념을 쏟을 때였다. 그때 동행한 분이 “아따 한 번에 다보면 쓰나! 다음에 또 오라는 게지!”하며 쓰린 마음을 달래는 것을 보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도 또 그 아름다운 날을 예측하여 찾을 수도 없다. 우연을 가장한 숙명처럼 찾아들 때 그때의 아름다움이 진짜 아름다운 것이다. 이는 새벽을 달려 오메가 일출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수십 번을 가도 못 본 오메가를 단 한 번에 보았다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주산지는 조선 숙종 때인 1720년에 착공하여 경종 1721년에 완공했다. 이후 지금까지 산골짜기를 흐르는 물을 모아 농업용수로 사용해 왔다. 그 오랜 세월 속에 물 가장자리로 왕버들이 군락을 이루어 자라났다. 왕버들은 물을 매개체로 하여 자라는 특별한 나무 중의 하나다. 여전히 물안개는 피고 왕버들은 그 속에서 사계절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든지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중 이 무명의 저수지에서 한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불교의 윤회사상과 업(業 : 불교에서 말하는 심신의 활동과 일상생활.)을 기초로 한 이 영화는 2003년 김기덕 감독에 의해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이란 제목으로 개봉 되었다. 그때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제야 무명의 작은 저수지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왕버들이 새순을 틔우는 봄날 사미승은 스승으로 모시는 노스님과 함께 봄을 찾아 산문을 나선다. 산문을 나서 다른 세계를 맞이한 사미승의 봄은 특별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살아 있는 생물을 당연하다는 듯 괴롭히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물고기는 잡아 아가미 부근에 실을 묶어 돌을 매달고, 개구리는 허리에 실을 묶어 돌을 매달고, 뱀은 목에 실을 묶어 돌을 매단다. 짓궂은 장난에 빠진 아이는 그들의 괴로움에서 천진한 웃음을 터트린다. 산 생명을 해코지 하는 것은 불교라는 종교를 떠나 죄를 짓는 것이다.
가만히 지켜보던 노스님이 아이의 등에 돌은 묶고는 개구리와 물고기 그리고 뱀을 찾아보란다. 어제의 길을 거슬러 흔적을 뒤진 끝에 물고기는 허옇게 배를 뒤집어 죽고 뱀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죽었다. 개구리는 지친 몸부림 끝에 용케도 살아난다. 그제야 스님의 의도를 알아차린 사미승은 울음을 터뜨린다. 그때 노스님은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너는 평생을 바위를 진 듯 무거운 업 속에 살리라!”
어쩌면 그 모습은 스님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일지도 모른다. 주산지라는 작은 저수지 한 중간에 비루한 절간을 지어 세상사 인연을 끊고 고행을 자처하는 모습은 사미승의 돌덩이를 대신 지고 있는 듯 했을 것이다. 모르고 행한 것은 죄가 아니라지만 하룻밤을 꼬박 불에 지지는 듯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다 죽어간 생명이 품은 한은 윤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죄업이며 필연코 짊어지고 가야하는 업인 것이다. 요행이 살아난 개구리라 할지라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악몽이었을 것이다. 그 고단한 삶 속에 나름대로의 생명을 싹틔웠다지만 그 해 만큼은 주산지의 봄이 잔인했던 것이다.
여름철로 접어들어 청년으로 자란 소년은 죽음을 목전에 둔 듯 병색이 짙은 소녀와 뜻밖의 조우를 한다. 공기 맑고 물 좋은 산속에서 세속이 걸쳐준 짐을 벗은 지 얼마 안가 소녀의 병은 호전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들은 또 다른 욕망에 휩싸인다. “욕망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살인을 부를 것이다.” 노스님의 선문답을 귓등으로 흘린 둘은 결국 젊음과 욕정이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산문으로 향한다. 작은 배에 몸을 싣고 위태하게 건너는 호수가 장차 레테의 강임을 알지 못하는 둘은 분홍빛 꿈에 사로잡혀 노를 저었던 것이다.
그 둘의 떠남은 이미 예정된 여로와 같아 비행기 티켓을 들고 탑승구에 선 상태였다. 스님의 방해를 예견하여 배까지 호수의 밑바닥으로 가라앉혔다. 그들만의 세계를 위해서 산문을 열어젖힌 그날에도 축복인 듯 불행인 듯 희뿌연 물안개는 뭉글뭉글 그렇게 피었다.
문을 나선다는 것은 다른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그 세상은 늘 미지수로 또 다른 굴레란 속박이 자신을 옭아매고 정신을 갉아 먹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제자리에서 안주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둘의 가슴을 헤집어 내면으로부터 솟구치는 욕망이 이미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좀비에 감염된 듯 이상향에 이끌려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상념에 사로잡혀 좌우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그 둘은 지금 가는 이 길이 꽃길이라 여겨 택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