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이슥하도록 아내와 가마니를 쳤다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보련다”는 박재홍의 노래로 유명한 손로현 작사, 이재호 작곡 ‘물방아 도는 내력’의 한 소절이다. ‘도레미레코드’에서 이 노래가 실린 음반을 내 놓은 해는 1953년이다. 새끼 꼬기는 이후로도 20여 년간 일상이었다. 농촌에서 새끼는 지붕‘이기(개량하기)’부터 꼴망태 만드는 데까지 안 쓰이는 데가 없었기 때문에 농부는 틈만 나면 새끼를 꼬았다.
새끼 꼬기는 지붕을 이을 때 집중됐다. 농부는 부엌과 안방과 ‘멀방(안방 곁에 딸린 방)’으로 구성된 초가삼간, 외양간과 창고가 있는 아래채 그리고 잿간의 지붕까지 이을려고 온 겨울을 짚과 씨름으로 보내야했다. 낮에는 양지바른 데 앉아서 이엉을 엮고 밤에는 멀방에서 새끼를 꼬았다. 지붕을 태풍에도 견딜 수 있게 격자(格子)로 촘촘히 묶자면 새끼가 여간 필요한 게 아니었다. 가을걷이가 끝나야 짚이 생기고 여유도 있어서 지붕일 준비는 언제나 겨울이었다.
이미 농사일로 거칠 대로 거칠어진 농부의 손은 다시 짚에 부대끼다보니 아예 닳기 시작했다. 소평마을 사람들로서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노랫말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굳은살은 트고 갈라져서 그 사이로 붉은 속살이 보였다. 속살은 바람이 닿으면 쓰렸다. 농부는 반창고를 발랐다. 반창고가 없으면 밥알을 으깨 넣어 틈을 채웠다. 그것을 ‘밥참한다’라고 했다.
밤에 새끼를 꼬기 위해서는 저녁 무렵에 짚단을 미리 준비해 놓아야 했다. 저녁 소죽 끓일 땔감으로 쓰려고 짚 볏가리로 가는 길에 한두 단을 더 빼내어 거름더미 곁에 갖다 놓았다. 거름더미 터는 지대가 높아서 짚단을 두드리기 좋고 짚을 추리고 남은 ‘뿍띠기(북데기)’는 거름에 바로 버리면 됐기 때문이다.
짚단 장만하기는 울매로 짚단을 두드려 손으로 곁 잎을 추리는 일의 반복이었다. 지름 20cm 정도의 통나무를 40cm 정도의 길이로 잘라서 만든 나무망치를 ‘울매’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무댕기 단 그대로 땅바닥에 눕혀 놓고 두 손으로 울매를 들어 뿌리 부분을 두들겼다. 몇 방 못가서 단을 묶었던 끈은 터지고 볏짚은 풀이 죽었다. 다음은 왼손으로 짚단의 머리를 곧추들어 올리고 오른 손가락을 볏짚 사이로 집어넣어 빗질하듯 훑어 내리는 순서였다. 이를 ‘추린다’라고 했다. 두드리고 추리고를 한 차례 더 하고 나서 물을 한 바가지 부은 후 거적때기를 덮어 놓으면 됐다.
농부의 아들은 멀방 아랫목에 놓인 앉은뱅이책상에서 공부를 하고 농부는 아들에게 방해가 안 되게 윗목에서 방문을 향해 돌아앉아 새끼를 꼬았다. 호롱불은 책상 책꽂이 위에 얹혀 있어 불빛이 희미했지만 농부는 전혀 탓하지 않았다. 한석봉 어머니 떡 썰 듯 불 끄고도 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끼 꼬기는 양손바닥 사이에 짚을 넣고, 손끝을 45도 각도가 되도록 비스듬히 세워서, 오른손 바닥은 가슴에서 바깥쪽으로 밀고 왼손 바닥은 가슴 쪽으로 당겨, 비벼내는 작업이었다. 굵은 새끼를 꼬려면 짚 포기 수를 늘리면 됐다. 짚은 뿌리 쪽부터 꼬아 들어가는데 새끼를 길게 꼬려면 가늘어 질 즈음이면 옆에 놓아두었던 짚단에서 짚을 빼내 잇대면 됐다. 농부의 손바닥은 직감적으로 짚 보탤 시점을 알아 새끼의 굵기는 일정했고 일련의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방안은 새끼 꼬는 소리와 아들의 연필 글씨 소리가 어우러져 사각거렸다. 새끼는 농부의 무릎 밑을 지나 오른편에 펑퍼짐하게 똬리를 틀고 아들은 호롱불 석유 심지를 돋워가며 공부를 했다. 이따금 안방에서 들려오는 식구들의 웃음소리가 정적을 깼다.
시간이 지나면서 농부는 나직하게 콧노래를 부르고 아들은 이 노래를 자장가 삼아 고개를 끄덕이며 졸았다. 이윽고 마지막 짚을 꼬고 매듭을 지은 후 왼팔과 오른발을 축으로 8자 모양의 타래를 만들었다.
가마니 치기용 새끼는 어느 새끼보다 가늘게 꼬아야 했다. 가마니틀의 바디 구멍을 통과시키려면 볏짚 두어 개로 꼰 것이 적당했다. ‘바디’란 서른여덟 개의 구멍이 뚫린 긴 나무막대로 짚이 날줄의 하나 건너 하나 사이로 끼여 들어오게 하고, 들어 온 짚을 아래로 쳐 내리는 역할을 했다. 날줄은 직사각형 가마니틀의 가운데 쯤 바디가 놓이게 걸었다. 가마니치기는 바디 아래쪽에 짚을 끼워 넣으면 바디를 잡은 사람이 그 짚을 쳐 내리는 연속적인 작업이었다. ‘가마니를 친다’고도 하고 ‘가마니를 짠다’라고도 했다.
가마니는 반드시 두 명이 있어야 칠 수 있었다. 대부분 아내가 긴 대나무 자로 짚을 먹이고 남편이 바디질을 했다. 짚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양방향으로 먹였다. 먼저, 남편이 왼손으로 짚 열 개 정도를 움켜쥔 채 바디 끝을 잡고 있으면 아내는 남편의 오른편에 앉아서 대나무 자를 날줄 사이로 밀어 넣어 남편의 손에서 짚을 낚아채갔다. 대나무 끝은 짚을 물어가기 좋도록 갈퀴 모양으로 돼 있었다. 이때 남편은 바디를 한번은 아래로 기울어지게 하고 다음번은 위로 기울어지게 해서 열아홉 개의 구멍이 홀짝으로 짚이 들어가도록 했다. 다음 열 번은 아내가 자를 돌려서 짚을 밀어 넣었다. 이때도 바디를 숙이고 들어 올리고를 번갈아가면서 했다. 낚아채 갈 때나 밀어 넣을 때나 짚은 언제나 뿌리 부분부터 들어갔다.
앞면을 다 치면 뒷면의 안 친 부분을 앞으로 나오게 해서 나머지를 쳤다. 면을 세 차례 돌려 치면 완성됐다. 그것을 그냥 쓰면 ‘거적’이 되고 돗바늘(쇠로 된 큰 바늘)로 양 옆을 깁은 후 옆의 남은 짚을 낫으로 잘라내면 비로소 가마니가 완성됐다. 가마니를 세웠을 때 높이는 어른의 가슴 정도고 폭은 짚의 길이 만큼이었다. 초저녁에 시작하여 밤늦게까지 치면 한 장을 칠 수 있었으나 보통은 이틀 걸렸다.
농촌에서 가마니는 벼, 밀, 보리, 콩 등 온갖 곡식을 담는 데 주로 쓰였다. 쌀 한 가마니는 80kg이었다. 등겨도 가마니에 담아 구르마(달구지)에 싣고, 등겨를 때고 난 재도 가마니에 담아 논에 냈다. 겨나 재는 누더기 가마니에 담았다. 곡식이 들어있는 가마니를 쥐가 뚫어서 돗바늘로 기운 가마니였다.
훗날 발로 밟아서 새끼를 꼬는 기계가 나오면서 손으로 새끼를 꼬는 일은 줄어들고, 1970년부터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꾸고 시중에 비닐노끈과 마대가 나오면서 점차 새끼와 가마니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이제 가마니는 민속촌이나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는 ‘공예품’이 되고 말았다. “혹시 주위에 가마니 보관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소평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김석봉 씨(80)와 김제평야에서 기계화 농업을 하고 있는 성빈교회 교우 서정철 씨(57)한테 물었더니 두 사람 모두 “없다”는 대답을 들려줬다.
“사람이 가마이(가만히) 있으니 가마이(가마니)때긴 줄 아나?” 가만히 사라져가는 가마니처럼 이 말도 잊히게 생겼다. 가마니는 박물관에나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