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문인들, 우리 둘레의 이야기 소재 발굴 답사 나서
대구의 문인들, 우리 둘레의 이야기 소재 발굴 답사 나서
  • 김영근 기자
  • 승인 2020.05.28 10:37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6차 소재찾기 모명재에서 가지다

수일 전 코로나19로 방문지인 대륜고등학교의 출입이 통제되어 아쉽게도 가보지 못했다.

삶의 재미는 무엇일까? 만나고 서로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나누고 또 생각한 것을 말로, 글로, 그림으로 자유로이 표현하는 시간이야말로 자신만의 행복일 것이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문인들 간 교류 기회 확대와 가까운 곳에 있으나 놓치고 있는 우리 둘레의 집필 소재를 발굴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조직되어 운영하는 집필 소재 발굴 답사 모임(대표 심후섭, 대구 수성 문인협회 회장, 대구 아동문학회 회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20 올해 답사 계획은 대구 문인협회 자유게시판에 공고해 두고 있다. 이번 제6차(올해 2회째) 모임은 지난 23일 14시 담티역 3번 출구에 60여 명이 모였다. 연초부터 활동하려 했으나 코로나19의 여파로 전체 모임을 하지 못해 실내 활동을 피하여 사회적 거리두기의 규칙을 지키며 짧은 시간이나마 희망자가 만나서 소재 발굴을 위한 답사를 했다. 참여자 준비물은 취재 수첩, 마스크, 선글라스, 운동화 착용이다.

모임은 장소 선정부터 전체 참여자의 편리성을 찾는다. 혹한 혹서기를 피하여 지하철을 이용하기 쉬운 곳에 모인다. 가족·친지·동호인과 함께 참여할 수 있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상호 교류하며 1회 모임 시간은 2시간 전후로 한다. 수시 전문가를 초청하여 방문지의 안내를 받거나, 설명을 듣는다고 한다.

지난해 10월 27일 첫 답사를 시작으로 올해 5월 16일 5차 답사를 마쳤다. 이번 제6차 답사는 지난 23일 14시 지하철 2호선 담티역 3번 출구 직전 광장에 모여 심 대표의 안내로 상호 인사 후 두사충 장군의 모명재, 효자 두한필 유적 정충각 등의 흔적을 돌아보며 임진왜란 당시의 우리 사회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이상화 시인 교가비. 이육사 시인 형제 문학비, 의인 이인호 소령 기념비는

모명재(慕明齋)는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때 2차례 조선을 돕기 위한 원군으로 와서 종전 후 귀화한 명나라 두사충 장군을 기리는 재실로 1912년 후손들이 건립하였으며, 그 후 1966년에 수리하였다. 재실은 4칸으로 중앙의 2칸은 강당이고 좌우에 방이 있다.

참여 회원들이 설준원 고산역장으로부터 모명재에 대한 해설을 듣고 있다. 김영근 기자
참여 회원들이 설준원 고산 역장으로부터 모명재에 대한 해설을 듣고 있다. 김영근 기자

강당에는 기문과 많은 편액이 걸려있다. 재실 대문은 만동문(萬東門)이라 하는데 이 문호는 ‘백천유수 필지동(百川流水必之東)’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즉 명나라를 기준으로 했을 때 모든 강물이 동쪽으로 흘러간다고 하여 ‘모든 것은 근본을 향한다.’ 즉 ‘뿌리를 잊지 않는다.’는 뜻을 담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자신의 모국인 명나라를 항시 잊지 않고 살아갔던 두사충의 마음이 깃든 현판이 아닐까 싶다. 기둥에는 또한 이순신 장군이 지어준 <봉정두복야>라는 한시가 주련으로 걸려있어 두 사람의 우정을 느끼게 한다. 또한 모명재 뒷 산록 두사충의 묘에는 이순신 장군의 7대손으로서 역시 수군통제사를 지낸 바 있는 이인수가 비문을 지은 신도비가 있어 대를 이어 서로 교류하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두사충은 명풍수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우려고 명나라 이여송 장군과 함께 조선 땅을 밟았다가 고국에 돌아갔으나, 7년 뒤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에는 매부인 진린 도독을 따라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왔다가 귀화한 인물로서 대구에 정착하였으므로 대구에는 뽕나무 골목, 대명동, 담티고개 등 두사충과 관련 깊은 곳이 많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기에 최근에 많은 돈을 투자해서 모명재에 대한 개·보수 및 정비가 이루어졌으며 ‘한국문화체험관’을 세워서 중국 관광객들에게 한복체험이나 다도 체험 등을 할 수 있게 한다.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은 엄동설한에 병든 어머니의 치료에 도움 되는 버섯을 구해 와서 병구완했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가 있을 만큼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뒷담을 돌아가니 담을 재건하면서 팽나무를 담 사이에 살려 뒀다. 수령이 오래되었으니 두사충과 관련지어 ‘두사충 나무’로 이름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듯하나 지금 고사 중이어서 아쉽다.

참여회원들이 두사충 장군의 묘소에 참배하고 있다. 김영근 기자
참여 회원들이 두사충 장군의 묘소에 참배하고 있다. 김영근 기자

모명재를 돌아보고, 담장을 따라 두사충의 묘를 찾아간다. 두사충의 무덤이 둘레석으로 쌓여 있다. 무덤 앞에는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 하도록 호석을 박아 놓았다. 그리고 무석인, 석마, 문인 동자 등도 세워져 있다. 비석은 천 대 만대 내려가라고 거북 돌 위에 세워놓았다. 묘의 양쪽에 ‘떠나는 벗을 그리워한다.’라는 꽃말을 지닌 배롱나무가 묘를 지키고 있다.

참여 회원들은 대구에 살면서도 와보지 못한 곳을 와 보고 새로운 내용을 알아서 기쁘다는 반응을 보였다. 심 대표는 “제7차 모임은 5월 30일 오후 2시 지산역에 모여서 효자 하잠동, 중화양씨 학익재 외 여러 곳을 답사할 계획이라며 많은 참여를 바란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