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캐리어를 창고에서 꺼냈다. 실장갑을 한 손에 모아 쥐고 먼지를 투닥투닥 털어낸다. 여행 계획을 세우고 나면 빈방 가운데 캐리어를 펼쳐 놓는 버릇이 있다. 속살을 드러내고 널브러진 캐리어에 시나브로 툭툭 던져 넣는 것들. 이쁜 속옷, 이쁜 머플러, 일회용 칫솔, 꽃무늬 새겨진 비옷, 굵은 테의 선글라스, 비상약 등이다.
코로나19가 종식되면 바다로 떠날 테다. 골목길을 좋아하는 내가 바다를 찾을 때는 심중의 변화가 필요할 때이다. 현실에서 도피하고픈 날이나 울분이 쌓이는 날은 동해로 간다. 내 투정 묵묵히 받아주는 아버지 숨결을 느끼고 싶어서다. 역마살이 지필 때는 서해로 간다. 그곳에 가면 섬에서 섬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에 신명마저 따라붙는다. 그러나 요즘처럼 지쳐있는 마음 보듬어줄 곳으로는 남쪽 바다 만한 곳도 없다. 기대고 싶고 안기고 싶고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은 날에는 어머니 가슴처럼 따뜻한 남해로 간다. 그렇게 달려가는 곳이 통영이다.
코로나 19가 종식되면 하릴없는 마음 나눌 통영에 가리라. 설레는 마음으로 ‘바다’ 폴더를 열었다. 여행을 앞두고 저장된 사진 갤러리를 들추는 것은 습관이다. 보란 듯이 석양 장면이 불쑥 나타났다. 불붙은 화살들이 한꺼번에 바다를 향해 쏟아지는 듯한 통영 앞바다의 해질녘 광경이다. 그야말로 저 붉은 해 향하여 ‘깃발’ 하나 꽂아 두고 싶다.
뜨는 해보다 지는 해가 더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젊은 날 노을 따위에 감성이 흔들리지 않았다. 퇴근길은 항상 서둘러야 했고 언감생심 멍하니 하늘을 바라볼 여유조차 없었다. 치열했다면 치열했던 시간을 뒤로 하고 어느새 내 나이 노령 반열에 올랐다. 좋아하는 것에 온전히 마음 열어 혼신을 다해 볼 일이다.
사진을 넘기다 또 한 장면에 눈길을 빼앗겼다. 반짝이는 바다 물결을 응시하고 있는 중년 여인의 뒷모습이다. 버버리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꼿꼿하게 서 있다. 마른 갈대와 여인을 사이에 두고 붉은 홑동백 몇 송이가 배시시 웃고 있다. 한 여인의 뒷모습과 바다, 동백꽃이 어우러진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내 마음은 이미 통영바다에 있다.
손바닥에 통영 앞바다를 올려놓고 내려다본다. 군청색 버버리 그 여인, 나였으면 좋겠다. 그 곳에 가면 누군가의 렌즈 속 피사체로 서서 긴장에 들고 싶다. 바다 언저리쯤에 동백나무 한 그루 심어두고 늙수그레한 사랑 하나 키우고 싶다. 서호시장 외진 골목 ‘애인’ 간판 걸어 놓고 충무 김밥 말다가 갑오징어 썰다가 무말랭이 다듬다가 나만 보면 와락 반기는 사람, 겨울 끝자락에 도다리쑥국 끓여놓고 기다려줄 ‘남자사람’ 만나 새벽닭이 울 때까지 술잔 기울이고 싶다.
신은순(대구시 달서구 진천동)